[딥리뷰] 갓 지은 쌀밥같이 담백했다...부흐빈더의 베토벤 ‘꾸미지 않아 감동’

5번 첫 악장의 가장 빠른 카덴차
베토벤스러움 잘 살려내며 연주

민은기 기자 승인 2024.06.28 17:11 | 최종 수정 2024.06.28 17:17 의견 0
루돌프 부흐빈더가 2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심장을 강타하듯 오케스트라는 세 번의 쿵 소리를 차례대로 터뜨렸다. 피아노는 쿵 소리의 굴곡을 타고 역시 세 번의 카덴차를 흘려보냈다. 1악장의 시작과 함께 마치 한 몸처럼 같이 출발하는 이 괴상하고 기이한 카덴차는 피아노 협주곡 5번 내림E장조(Op.73) ‘황제’의 시그니처다. 협주곡을 카덴차로 시작하는 것은 협연자와 오케스트라가 오랫동안 맺어온 암묵적 규칙을 어긴 도발이다. 베토벤스럽다. 베토벤다운 사운드다.

1946년생의 피아니스트는 피아노 앞에 앉아 악단을 지휘했다. 1인 2역, 협연자와 지휘자의 역할을 겸한 것.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음 하나 하나를 정성스럽게 만졌다. 목관악기가 제법 큰 볼륨을 뽑아내야 할 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전체적인 행진곡풍 사이로 유려하게 선율이 흘렀다.

2악장. 피아노 협주곡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악장중 하나다. 영화 ‘불멸의 연인’에서도 이 악장이 메인음악으로 쓰였다. 첼로와 더블베이스의 피치카토를 타고 꿈길이 열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길이다. 옆자리의 그 사람이 썸을 타는 사이였다면, 오늘 반드시 고백을 하게 만드는 악장이다.

그동안 그냥 지나쳤던 플루트, 오보에, 바순, 호른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부흐빈더가 일부러 손가락의 힘을 뺐을까, 아니면 병풍 신세를 벗어나고 싶었던 목관이 “사고 한번 치자”라며 고개를 뻣뻣이 쳐들었을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색다른 소리 조합이 좋다. 참신하다.

잠시의 멈춤도 없이 자연스럽게 3악장으로 이어졌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흥겨운 케미가 어깨를 살짝 들썩이게 만든다.

루돌프 부흐빈더가 2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베토벤 스페셜리스트’로 불리는 루돌프 부흐빈더가 2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 연주를 시작했다. 이날은 1번과 5번을 들려줬고, 30일은 2번→4번→3번 순서로 연주한다. 다니엘 도즈가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루체른 페스티벌 스트링스’와 호흡을 맞췄다.

무대로 나온 부흐빈더와 단원들이 관객에게 인사했다. 뒤를 돌아 합창석 관객에게까지 인사하자 와~ 함성이 쏟아졌다. 이후 곡이 끝나고 인사할 떼마다 앞자리와 뒷자리의 함성 배틀이 이어지는 흐뭇한 광경이 연출됐다.

베토벤은 피아노가 단순한 협주 악기를 넘어 오케스트라와 동등한 위치에서 교향악적존재감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준 주인공이다. 5번 ‘황제’에서 드러나듯, 장대한 관현악이 연주하는 단 하나의 화음 직후 역사상 가장 빠른 카덴차가 등장한다. 파격이자 혁신이다. 부흐빈더는 이렇게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베토벤을 ‘위대한 혁명가’라고 부른다.

부흐빈더가 터치한 베토벤은 담백했다. 12첩 반상의 기본은 쌀밥이다. 그 흰 쌀밥을 정성스럽게 지어냈다. 갓 지은 쌀밥만큼 맛있는 것이 어디 또 있는가. 나머지 반찬들은 곁가지에 불과했다. 무엇인가 주렁주렁 매달아 치장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음악이 흘렀다.

루돌프 부흐빈더가 2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 뒤 루체른 페스티벌 스트링스의 다니엘 도즈 예술감독과 악수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루돌프 부흐빈더가 2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악단을 지휘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1부에서 연주한 베토벤의 협주곡 1번 C장조(Op.15)는 그의 ‘첫 번째’ 협주곡이 아니다. 그에 앞서 피아노 협주곡 2번 내림B장조(Op.19)를 먼저 초연했지만, 베토벤은 더 나중에 완성한 작품을 ‘1번’으로 출판했다.

1악장과 3악장은 독립적으로 놓고 보면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무난한 음악이다. 평범한 소나타 형식(1악장)과 소나타 론도 형식(3악장)으로 특별히 베토벤스럽지 않다.

하지만 2악장의 조성 내림A장조는 나름의 파격이다. C장조 작품에서 내림A장조라니! 목관이 백그라운드를 깔아주고 그 뒤를 따라 나오는 클라리넷과 피아노의 조화로운 대화는, 나도 모르게 그 대화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음악평론가 류태형(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은 “부흐빈더의 베토벤, 무슨 말이 필요할까. 굴드의 바흐, 우치다의 모차르트, 브렌델의 슈베르트처럼 ‘약사와 약’ 같은 조합이다”라며 “78세의 피아니스트는 여전했다. 베토벤이라는 엄격하고 어려운 틀 안에서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연주자가 부흐빈더였다”고 말했다.

<백브리핑> 자연스럽게 흘렀다...5곡 모두 다른 지휘자·악단과 연주

루돌프 부흐빈더가 2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공연에 앞서 리허설을 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루돌프 부흐빈더가 2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공연에 앞서 리허설을 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루돌프 부흐빈더와 루체른 페스티벌 스트링스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 연주 프록그램북에 눈길을 끄는 글이 실렸다. 음악평론가 신예슬의 ‘부흐빈더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 음반 리뷰’다.

2시간 45분. 베토벤이 1795년부터 1809년 사이에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전곡의 러닝 타임이다. 부흐빈더는 2021년 도이치 그라모폰(DG)에서 CD 세 장으로 구성된 전곡 음반을 발매했다. 오스트리아 빈의 무지크페라인 창립 150주년을 기념해 무지크페라인에서 실황으로 녹음한 앨범이다.

피아니스트는 부흐빈더 단 한 명이었지만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는 매번 달랐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안드리스 넬손스(협주곡 1번),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 마리스 얀손스(협주곡 2번), 뮌헨 필하모닉과 발레리 게르기예프(협주곡 3번), 드레스덴 슈타츠카렐레와 크리스티안 틸레만(협주곡 4번), 빈 필하모닉과 리카르도 무티(협주곡 5번). 악단과 지휘자의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조합이다. 월클과 월클의 만남이다.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모두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곡마다 드라마틱하게 변화할 수도 있었지만, 부흐빈더의 마음은 평온했다. 계속되는 파트너의 변화에도 요동치지 않았다. 무엇인가를 과장하지 않았고, 어떤 감정을 표현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특정 선율은 아름다운 벨칸토 아리아처럼 노래하듯이 연주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탐미적인 순간을 만들기보다는 그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담담하게 노래했다. 오히려 거기에서 어떤 깊은 힘이 솟아났다. 애쓰지 않아도 그의 연주로부터 음악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루돌프 부흐빈더가 2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공연에 앞서 리허설을 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루돌프 부흐빈더가 2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공연에 앞서 리허설을 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베토벤의 음악은 때로는 그의 다사다난한 생애와 맞물려 강렬하게 연주되곤 한다. 그의 방문을 두드렸던 운명의 노크 소리, 절망에서 환희로, 청력 상실을 딛고 음악을 멈추지 않은 초인적 작곡가, 음악의 성인...이런 말들은 그의 음악이 들려오는 것보다 더 대단한 무엇인가를 느끼게 하지만, 부흐빈더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피아노 앞에서 시간을 보냈을 한 음악의 하루하루를 떠올리게 한다.

고전주의의 명료한 질서를 따르며 눈을 반짝이던 한 소년의 모습, 더 큰 구조를 담아내기 위해 음악 세계관을 넓혀가던 야심찬 청년의 모습, 그리고 내면으로 침잠하며 새로운 논리를 고안하던 중년의 모습. 베토벤은 그렇게 수많은 변화를 마주해왔지만 늘 피아노 앞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늘 건반을 두드리며 음악에 관해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부흐빈더의 연주는 바로 그 피아노 앞의 베토벤을 만나게 한다. 바깥으로 화려하게 드러나는 모습은 아니지만, 거기에는 어디까지 깊어질지 알 수 없는 음악의 세계를 끝없이 헤아려보는 정성스러운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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