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몰래 셀카로 영정사진 찍어 놓았어”...한국가곡 사랑했던 이정식 전 CBS사장

41년 언론인 생활...암투병 끝 70세 별세
우리가곡 역사 다룬 책 쓰며 성악 활동도
​​​​​​​마지막까지 ‘톨스토이의 가출’ 출간 뭉클

박정옥 기자 승인 2024.10.16 18:32 | 최종 수정 2024.10.18 13:41 의견 0
이정식 전 CBS 사장이 향년 70세로 16일 별세했다. ⓒ유족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이정식 전 CBS 사장을 마지막으로 본 날은 여름비가 오락가락하던 지난 7월 23일이다. 1년에 서너 차례씩 정기적으로 만나 점심을 먹었다. 이날은 서울 구로디지털단지역 근처에서 옛 직장동료들과 함께 만났다.

서울문화사 부회장에서 퇴임한 직후 대장암에 걸린 것을 알았다. 어느새 암이 간과 폐로 번졌지만 대장암 수술 뒤 꾸준히 치료를 받았다. 의지가 강했다. 말 못할 불편이 셀 수 없이 많았겠지만, 겉으로는 건강했을 당시의 생활과 별반 다르지 않게 늘 활기찼다. 긍정적 마인드도 똑같았다.

하지만 그날은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살짝 무거웠다. “이달 초에 병원을 갔더니 의사가 ‘더 이상 항암 치료를 계속할 방법이 없다’고 포기선언을 했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담도 쪽으로도 암이 전이돼 특히 통증이 심하다고 설명했다. 밤에 잠자기가 어렵다고 했다.

이정식 사장은 러시아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문학적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시베리아 문학기행’을 2017년에 출간했다. 2020년 4월 대장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시작한 후에는 더 열성적으로 글을 썼다. 41년간 언론계에 몸담았으니 그에게 글은 힘을 주는 비타민이었다.

이전에 쓴 원고와 새로 쓴 원고를 모아 ‘러시아 문학기행1 도스토옙스키 두 번 죽다’(2020년 7월)와 ’러시아 문학기행2 도스토옙스키 죽음의 집에서 살아나다’(2021년 1월) 두 권을 냈다. 그 뒤 코로나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건강 문제 등 여러 사정이 겹쳐 운신에 제약을 받으면서도 그동안 써 둔 여행기를 모아 ‘여행작가 노트’(2021년 11월)를 내놓았다.

50여 차례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 몸을 괴롭히는 각종 부작용은 쉼 없이 계속됐다. 다행스럽게도 외부활동이 아닌 일상생활에는 큰 지장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7월 초 담당 의사가 이 방법 저 방법 다 써봤지만 최근 임상시험 약도 내성이 생겨 줄어들었던 암세포가 다시 커진 이상 다른 치료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고, 사실상 손을 놓겠다는 말을 하자, 지난 4년 이상 지니고 있었던 희망의 불꽃이 한 순간 꺼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점심을 먹으면서도 책 이야기를 많이 했다. ‘톨스토이의 가출’이라는 제목으로 새 책을 펴낼 예정인데, 여기 약속 장소에 나오기 전 원고를 출판사에 넘겨 홀가분하고 말했다. 책 말미에 ‘후기’를 붙일 계획이라고 알려줬다. 그러면서 프린트한 원고를 건네줬다. 공식 출판되기 전에 한번 읽어 보라며 ‘후기’를 미리 보여준 것. 울컥했다.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이게 마지막 책이 아니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톨스토이의 가출’은 348쪽으로 출간됐다. 339~348쪽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이정식 작가가 열두번째 저서 ‘톨스토이의 가출’을 출간했다. 표지 사진은 모스크바 톨스토이 박물관에 있는 톨스토이 동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정식 작가. ⓒ황금물고기 제공


<“더 이상 항암 치료를 계속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 갑자기 오다니. 그러면 나의 생명은 얼마나 남은 것인가. 의사가 치료 포기 선언을 하면 환자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지? 온갖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지난 4년 이상 지니고 있었던 희망의 불꽃이 한 순간 꺼지는 것 같았다.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책으로 내려고 써 놓은 원고도 잔뜩 있는데... “원 세상에! 인생 마감시간에 쫓기다니...” 간호사가 호스피스 상담실에 들렀다 가란다. 호스피스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평생 처음으로 동네 헬스장에 등록하고 다음날부터 다니기 시작했다. 트레이너로부터 하나하나 배워가며 가장 가벼운 것부터 시작했으나 그것도 조금 하면 힘이 들어 쉬엄쉬엄했다. 중단했던 맨발걷기를 다시 시작했다. 항암주사 후유증으로 발바닥과 뒤축이 이리저리 너무 갈라져 하다말다 할 수 밖에 없었다. 항암주사 안 맞으니 발바닥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근력운동과 더불어 맨발걷기도 매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평생 처음 종일 계속되는 통증을 겪고 있다. 12시간 지속되는 진통제를 12시간 간격으로 계속 먹어도 통증이 중간 중간 찾아온다. 어떤 때는 한참 머문다. 통증이 오면 모든 것이 올 스톱이다. 통증이 오는 순간은 몸에 힘을 줄 수 없으므로 신체가 순식간에 오그라드는 것 같다.

사람은 모두 자기가 죽을 것을 안다. 그러나 죽지 않을 것처럼 산다. 죽음에 임박해서는 모두가 기적을 기대한다. 나는 암 발생 이후 언제나 ‘주님의 뜻에 순종할 뿐이다’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가톨릭 의과 대학에 시신을 기증하신 어머니의 뜻을 따라, 3년 전 어머니의 유골을 받아 오던 날 나의 시신 기증을 의과대학 측에 약속했다. 나의 육신은 사후에 의대생들의 공부를 위한 해부학 교실에 올려 질 터이니 그것도 살면서 세상에서 받은 여러 혜택과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것이 되지 않을까 스스로 위안을 해본다.>

이정식 사장은 ‘톨스토이의 가출’이 출간되자마자 집으로 보내줬다. 그리고 9월 27일 문자를 받았다. “잘 지내? 책은 받았는지? 나는 어제도 응급실에 갔다 나왔어. 후기에 내 상태를 설명했지만, ‘생사의 갈림길에 쓴 12번째 저서’라는 내용으로 책 소개를 해도 좋을 것 같네. 건강하게 잘 지내시게.”

그의 말대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쓴 ‘톨스토이의 가출’...이정식 작가 열두번째 저서 출간>이라는 제목으로 책 소개를 했다. 집을 뛰쳐나가 열흘 후 숨진 82세 대문호의 파란만장 생애를 문학에세이 형식으로 썼으며, 저자의 암투병기를 다룬 9쪽 분량의 후기는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고 썼다. 10월 5일 문자를 받았다. “고생했어. 고마워.”

1954년 서울에서 출생한 이정식 사장이 16일 서울 목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70세. 7월 23일 마지막 만남에서 그는 특별히 당부의 말을 건넸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언론인으로 기억하겠지만, 자네라도 나를 한국가곡을 사랑했던 사람으로 알려줬으면 좋겠어.”

그는 노래를 잘 불렀다. 무대에도 자주 섰다. CBS, 뉴스1, 서울문화사의 CEO로 일할 때는 대규모 한국가곡 음악회를 자주 열었다. 가끔 같이 차를 타고 이동할 때면 낮은 바리톤 음성으로 ‘아무도 모르라고’(임원식 시·김동환 곡)를 흥얼거렸다. “떡갈나무 숲속에 졸졸졸 흐르는/ 아무도 모르는 샘물이길래/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오지요/ 나 혼자 마시곤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오는 이 기쁨이여” 이제 이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안타깝다.

이정식 애창가곡 1~4집을 내는 등 프로급 실력을 뽐냈다. 또한 한국가곡을 만든 시인과 작곡가의 숨겨진 스토리를 다룬 <이정식 가곡 에세이 ‘사랑의 시, 이별의 노래> <가곡의 탄생>을 썼다. 한국가곡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다룬 책이다. 많은 성악가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

더 이상 치료를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뒤 이정식 사장은 양복과 넥타이를 골라 셀프 영정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인화해 액자에 넣어 집으로 배달되게 했는데 아내에게 들켜 난감했다는 말도 털어 놓았다.

고인은 경복고와 서울대 사범대 지구과학과를 졸업했고, 홍콩대 중국어문과정을 수료했다. CBS, KBS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CBS 워싱턴 특파원, 정치부장, 사장을 거쳐 CBS노컷뉴스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한국방송협회 부회장, 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 예술의전당 이사, 뉴스1 사장 및 부회장, 서울문화사 부회장을 지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고옥주 씨(시인)와 아들 이승호(작곡가·음악감독)·이승찬 씨(직장인), 며느리 김현정(배우)·오유진 씨(하버드의대 박사연구원)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이며, 발인은 18일 예정이다.

고인의 시신은 발인식 후 "의학 발전에 기여하고 세상에서 받은 여러 혜택과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다"는 생전의 뜻에 따라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 기증된다.

/park72@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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