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손가슬이 오페라 데뷔 20주년을 기념해 오는 4월 3일 서울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에서 ‘히로인즈’라는 타이틀로 독창회를 연다. ⓒ손가슬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많은 음악 작품에는 매력적인 여자 주인공이 나옵니다. 그들 대부분은 실제 역사 속 인물이기도 하고 창작자가 만든 가상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위대한 음악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만을 따로 떼어내 프로그램을 구성했습니다.”

소프라노 손가슬이 오페라 데뷔 20주년을 기념해 ‘참신한 기획’을 선보인다. 음악 작품에 나오는 여성 주역들을 전면에 내세운 리사이틀을 준비한 것. 오는 4월 3일(목) 오후 7시30분 서울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에서 ‘히로인즈(Heroines)’라는 타이틀로 독창회를 연다. 최근 그를 만나 공연을 앞둔 소감을 들었다.

포스터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성악가들은 자신이 부를 노래를 만든 작곡가의 이름을 포스터에 적는 게 일반적인데, 그는 달랐다. ‘히로인즈’라는 제목 아래 클레오파트라·그레첸·클레르헨·미뇽·비올레타·안나 볼레나 등 여섯 명의 이름을 넣었다. 헨델·슈베르트·볼프·베르디·도니제티를 과감히 포기하고, 그들이 창조해낸 음악 속 주인공을 간판으로 내걸은 것. 포스터 사진도 아이디어가 반짝인다.

“뜻 깊은 의미를 담고 싶어 살짝 디자인 작업을 가미했어요. 오른 손으로 큰 구슬을 들고 있는데, 그 구슬 안에 제가 들어가 있어요. 음악과 함께 한 지난 20년의 나에게 고맙다며 셀프 칭찬하는 모습이라고 할까요. 그런 의도가 잘 전달됐으면 좋겠네요. 왼쪽에 구슬이 하나 더 있는데, 앞으로의 20년을 채울 구슬입니다. 기대되시죠?”

손가슬은 리사이틀에서 선보일 곡들을 하나씩 소개했다. 1부에서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의 오페라 ‘이집트의 줄리오 케사레’ 중 클레오파트라가 부르는 아리아 2곡을 들려준다. ‘V’adoro, pupille(사랑스러운 그대 눈동자)’와 ‘E pur cosi un giorno...Piangero la sorte mia(이렇게 하루 만에...내 운명을 슬퍼하지 않으리)’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영어명으로 ‘줄리어스 시저’라고 부르는데, 헨델은 오페라 작곡 당시 이탈리아식으로 ‘줄리오 케사레(Giulio Cesare)’라고 제목을 붙였다.

“두 곡 모두 개별적 독창곡으로도 자주 연주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사랑스러운 그대 눈동자여’라며 케사레를 유혹합니다. 치밀한 정략적 계산이 깔려있죠. 나중에 궁지에 몰려 죽을 위기에 빠진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가혹한 처지를 탄식하며 ‘이렇게 하루 만에...내 운명에 슬퍼하지 않을 거야’라며 노래합니다. 이 두 곡의 포인트는 고풍스러운 느낌을 최대한 살리는 겁니다. 그런 점에 주목해 감상해 보세요.”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쓴 문학 작품에는 많은 여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 여인들은 작곡가의 창작욕을 부추기는 영원한 뮤즈였다. 프란츠 슈베르트와 휴고 볼프도 ‘괴테의 여인들’과 사랑에 빠졌다.

서른 한 살의 짧은 생을 살다간 슈베르트는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영감을 받아 ‘Gretchen am Spinnrade(물레 돌리는 그레첸)’을 만들었고, 또한 괴테의 ‘에그몬트’에서 힌트를 얻어 ‘Klärchens Lied(클레르헨의 노래)’를 작곡했다.

“성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물레 돌리는 그레첸’은 입시곡이라는 선입견이 있어요. 그레첸이 파우스트와 사랑에 빠진 뒤 혼란스럽고 괴로운 마음을 숨긴 채 실을 뽑아내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곡입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 정말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마왕’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곡에서도 피아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어요. 피아노가 실제 물레를 돌리는 느낌을 표현하고 있거든요.”

이번 독창회에서 피아니스트 박상욱과 호흡을 맞춘다. 박상욱은 신미정과 함께 ‘신박듀오’로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슈베르트 가곡의 가장 큰 특징은 성악가와 피아니스트가 대등한 위치에서 음악을 이끌어 간다는 점이다”라며 “주역과 조역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두 사람 모두 주역이다”라며 박상욱에 대해 든든한 신뢰감을 표시했다.

손가슬은 슈베르트 ‘클레르헨의 노래’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 곡을 더 잘 부르기 위해 최근 네덜란드 독립 영웅인 에그몬트 백작과 관련된 소설도 읽었다”고 말했다. 매사 모든 일을 허투루 넘기지 않는 꼼꼼한 성격이다.

휴고 볼프는 ‘괴테 가곡집’을 남겼다. 괴테가 지은 시를 노랫말로 삼아 52개의 곡으로 구성됐다. 그중 다섯 번째 곡부터 일곱 번째 곡까지, 그리고 아홉 번째 곡이 괴테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나오는 시를 가사로 하고 있다.

소설에서 빌헬름은 어린 시절 유괴돼 곡예단에서 학대받는 소녀를 구하고 그의 보호자가 된다. 이 소녀가 미뇽이다. 미뇽은 자신을 구해준 빌헬름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결국 죽음을 맞게 되는 비련의 여인이다. 이런 점 때문에 미뇽은 많은 작곡가들을 심쿵하게 만든 캐릭터다.

52곡의 ‘괴테 가곡집’에서 이 네 곡을 분리해 ‘미뇽의 노래’로 묶기도 한다. 손가슬은 제1곡 ‘Heiss mich nicht reden(말하라 하지 말고)’, 제2곡 ‘Nur wer die Sehnsucht kennt(오직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제3곡 ‘So lasst mich scheinen(이 모습 이대로 두세요)’, 제4곡 ‘Kennst du das Land(그대는 아시나요 남쪽 나라를)’를 들려준다. 그는 “볼프를 무척 좋아한다. 비록 화성은 어렵지만 아름답고 신묘한 천상계의 음악 같다”며 기대해도 좋다고 언급했다.

2부는 오페라 아리아를 준비했다. “아리아의 경우 드라마적 흥미와 재미를 주기 위해 레치타티보(대사를 노래하듯이 말하는 부분)-카바티나(곡의 반복이 없는 짧은 노래)-카발레타(카바티나와는 대조적으로 빠른 템포와 리듬을 가진 노래)로 이루어져 있다”면서 “전막 오페라 감상의 효과를 주기 위해 레치타티보 파트를 넣었다”고 설명했다.

손가슬은 먼저 주세페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에서 비올레타가 부르는 ‘E strano...Ah,fors’e lui...Sempre libera(이상해...아 그대였던가...언제나 자유롭게)’를 연주한다. 알프레도의 구애를 뿌리치며 부르는 노래인데 복합적 심리상태가 점층적으로 고조된다. ‘라 트라비아타’는 그의 데뷔 오페라다. 2005년 스물세 살 때 스페인에서 열린 ‘페렐라다 페스티벌’을 통해 신고식을 치렀다.

“오디션을 봤는데 덜컥 합격했어요. 세계적 마에스트로 야코프 클레이즈베르크가 지휘한 여름밤 야외 오페라였습니다. 사흘간 리허설·정식공연·정식공연이 진행되는 강행군 이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 다니엘 바렌보임이 피아노 독주회를 열고, 또 호세 반담이 무대에 서는 등 정말 굉장한 페스티벌이었습니다. 오랫동안 1순위로 꿈꿨던 배역이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역할을 맡아 무척 감사하고 감사했어요.”

손가슬은 이어 가에타노 도니제티의 ‘안나 볼레나’에 나오는 ‘Piangete voi...Al dolce guidami...Coppia iniqua(울고 있나요...내가 태어난 곳으로 데려다 주세요...사악한 부부여’를 들려준다.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안나 볼레나(영어명 앤 불린)가 처형되기 직전에 부르는 노래입니다. 정신착란 상태에서 부르는 ‘매드 신(Mad Scene)’이죠. 서정적 전개 뒤에 파워풀한 음악이 이어지는 광란의 아리아는 최고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이번 리사이틀 프로그램은 관객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레퍼토리다. 따로 친절 해설을 덧붙이면 좋을 것 같다고 말하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음악 감상의 큰 매력 가운데 하나는 자기만의 클레오파트라, 비올레타, 안나 볼레나가 되어 즐기는 것이다”라며 자신만의 고유한 취향을 개발해야 한다고 팁을 줬다.

“노래를 좋아해 모든 걸 던져 살아냈던 20대를 지났고, 조금 더 성숙함으로 음악과 사람을 사랑하려 했던 30대를 거쳐, 이제 40대의 나이가 됐어요. 불혹을 맞이하고 보니 음악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바라 본 세상은 더 아름답고 더 배울 것이 많아 신비롭습니다. 이번 리사이틀은 노래와 무대 위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 모든 것들에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여러분들도 저와 동행해 주세요.”

/park72@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