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바이올리니스트 김응수가 300년 바이올린 음악의 역사를 30개 공연에 담아내는 ‘점과 선(Dots and Lines)’ 시리즈의 시즌2를 시작한다. 지난 4월 시즌1을 매진 행렬 속에 마무리한 가운데 이번에도 바이올린 음악을 빛낸 찬란한 작품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낸다.
김응수는 오는 8월 1일(월)부터 20일(토)까지 서울 강남구 언주로 더샵갤러리에서 낭만을 주제로 ‘점과 선’ 두 번째 시즌을 진행한다. 시즌1이 바흐와 베토벤이라는 두 개의 큰 점에서 뻗어 나가는 선을 여러 작품으로 소개했다면 시즌2는 낭만이란 주제가 시대와 인물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며 연결되는 지를 들려준다.
김응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사랑하는 바이올리니스트다. 그와 협연이 끝나면 바이올린 주자들이 먼저 사진을 찍자고 찾아온다. 초절기교의 이자이 소나타를 앙코르로 공연한 날엔 “이런 연주를 라이브로 듣게 될지 몰랐다”라며 감탄이 쏟아진다.
전문가들이 김응수를 가리켜 ‘저평가된 연주자’라고 말하는 것은 대중적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었다. 어떤 면에서 ‘점과 선’은 이를 돌파하기 위한 야심찬 기획이다. 1년 안에 레퍼토리가 겹치지 않게 연주회를 30회 개최하는 것을 두고 어떤 이는 무모한 일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김응수의 생각은 다르다.
“현존하는 바이올린 소나타와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곡을 모두 연주한다면 70~80회의 연주회가 필요할 겁니다. 30개라면 줄이고 줄인 겁니다.”
‘개별 곡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부족하지 않을까’하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김응수의 하루를 들여다보면 그런 생각이 사라진다. 그의 아침은 한 시간이 넘는 연습으로 시작한다. 단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다. 근면과 성실로 곡을 분석하고 이해하고 연마한다.
작품을 연구하는 것과 함께 쉬지 않는 것이 또 있다. 바로 철학, 문학, 역사와 관련된 책읽기와 토론이다. 음악을 대하는 그의 진실된 태도는 인문학 공부의 방식을 닮았다. 그래서 더욱 미덥다.
그는 고정된 시각이 아니라 입체적 시선을 동원해 작곡가, 사조, 개별 작품을 들여다본다. 작품은 더 이상 박제 상태의 표본이 아닌 살아있는 생명체가 된다. 같은 레퍼토리를 연주해도 늘 신선한 해석을 들려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김응수의 걱정은 정작 다른 곳에 있다. ‘점과 선’이 빼어난 기교를 뽐내는 쇼케이스나엄청난 수의 작품을 연주하는 아크로바트로 인식될까 하는 것이다. 그의 바람은 간단명료하다. 말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하는 음악이란 언어를 이용해 길게는 300년 넘게 이어온 사람들의 느낌과 생각을 나누고 싶다는 것이다.
시즌2의 부제는 ‘한여름 밤의 꿈’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제목에서 따왔다. 낭만이란 주제와 연주가 열리는 시기를 감안했다. 셰익스피어 작품의 주무대는 궁전과 숲이다. 창문 너머 도산공원 숲이 보이는 공간에서 연주회가 열리니 환상과 사랑과 낭만의 느낌이 배가된다.
낭만이란 단어는 2000년 넘는 세월을 살며 많은 의미를 담게 됐다. 사랑, 영웅, 환상, 무모함, 급진, 자의, 이성의 결여, 포근함 등등. 많은 점과 선이 낭만이란 말 속에 들어있다. 시즌2의 레퍼토리 또한 마찬가지다.
톨스토이에게 강박적 질투를 다룬 소설을 쓰도록 영감을 주었던 ‘크로이처 소나타’, 할리우드 영화음악이었으나 철의 장막을 넘을 정도의 힘이 있었던 ‘카르멘 환상곡’, 결혼 축하곡으로 쓰였다가 세월이 흐르고서 망부가로도 오랫동안 연주됐던 프랑크 소나타, ‘불멸의 연인’과의 사랑이 실패로 끝나고 침묵과 숙고 끝에 탄생한 베토벤 10 번 소나타, 쇠가 갈리고 피가 터지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탄생한 야나체크 소나타 등 시즌2의 곡들은 사연이 많다.
음악적으로 관심을 끄는 공연은 환상곡만으로 구성된 아홉 번째 공연, 웃는 얼굴 밑으로 눈물이 흐르는 모차르트 작품의 열 번째 공연, 격한 감정으로 유명한 ‘크로이처’와 슈트라우스 소나타의 세 번째 공연이다. 또한 편안한 정서가 부각되는 네 번째와 여덟 번째 공연도 기대된다. 열 번의 개별 공연에 붙은 부제와 희곡의 인용문은 다양하게 뻗어가는 낭만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다.
낭만은 우연한 기회에 나타나 점과 점을 연결한다. 낭만은 종종 꼼꼼한 분석에 따른 합리적 결론보다 강한 힘을 발휘한다. 스티브 잡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미래를 향해 인생의 점들을 이어갈 수는 없다. 오직 지나온 날들의 점들을 이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지금의 점들이 언젠가 미래에 이어질 것을 믿어야 한다. 그것이 배짱이든, 운명이든, 인생이든, 인연이든 뭐든 믿어야 한다.”
낭만과 사랑의 감정으로 만들어진 곡들이 오랜 세월을 견뎌 우리에게 연결된다. 어떤 모습으로 지금의 연결이 뻗어나갈지 모른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여러 의미로 꽤 낭만적일 것이다.
시즌2의 공연일정은 다음과 같다. 열 번의 공연에 각각 다른 부제를 달았고, ‘한여름 밤의 꿈’에 나오는 희곡의 인용문도 붙였다. 세심한 프로그램이다. 김동선, 이선호, 강자연, 김용진, 김정권 등 다섯 명의 피아니스트가 번갈아 가며 김응수와 호흡을 맞춘다.
● 여름의 낭만(8월 1일) : “난 아직 우리가 잠들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4막 1장-디미트리어스)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20 번, K.303 / 그리그 바이올린 소나타 3 번, Op.45 / 수크 네 개의 소품, Op.17
-모차르트 소나타의 1악장 도입부는 사뭇 몽환적이다. 그리그 소나타는 밝고 음산한 분위기가 교차하는 가운데 북유럽의 풍경을 꿈꾸게 한다.
● 사랑의 열정(8월 3일) : “연인들과 광인들 머릿속엔 엉뚱한 환상들이 들끓고 있어” (5막 1장-테세우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6번, Op.30-1 /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2번, Op.100 / 생상스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Op.28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쓸 정도로 깊은 고뇌에 빠졌던 베토벤이 마음을 다잡고 처음 출판한 작품 번호 30의 소나타는 이전 세대의 소나타와 궤를 달리 하는 개성이 돋보인다. 클라라 슈만은 브람스 소나타의 마지막 악장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 땅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여정을 이 악장과 함께 한다면 좋겠어요.”
● 사랑에 미치다(8월 5일) : “제 귀는 당신 노래에 반했고 제 눈은 당신 모습에 홀렸어요”(3막 1장-티타니아)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 Op.47 / R. 슈트라우스 바이올린 소나타, Op.8
-베토벤 소나타 9번을 헌정 받은 크로이처는 이 곡이 “터무니없으며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라고 했다. 80여년이 흐른 후,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이 곡에서 영감을 받아 지극히 강박적인 질투를 다룬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를 썼다. 소설은 엄청난 격론을 촉발시켰고 여러 연극과 영화로 개작됐다. 이 덕분에 베토벤의 소나타 또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 여름의 아침(8월 8일) : “아침을 알리는 종달새 노래가 들립니다”(4막 1장-퍽)
-르클레르 바이올린 소나타 Op.9-3 / 야나체크 바이올린 소나타, JW VII/7 / 드보르자크 네 개의 낭만적 소품, Op.75 / 이자이 소나타 6번, Op.27-6
-야나체크의 유일한 바이올린 소나타는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쓰였다. 강렬한 첫 악장은 쇠가 갈리는 전쟁터를 연상시킨다. 그러다 따뜻한 민요 주제의 2악장이 나오고 독특한 스케르초의 3악장이 나온다. 마지막 악장은 아무도 없는 황무지에 서 있는 느낌의 아다지오다. 살육과 파괴의 현장에서 작곡가는 잠시 평화로운 옛날을 그렸던 게 아닐까.
● 사랑의 결실(8월 10일) : “모두 영원히 진실하게 사랑하라”(5막 2장-오베론)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7 번, Op.30-2 /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 CFF 123, FWV 8
-프랑크의 소나타는 이자이의 결혼식 축하용으로 쓰였다. 이자이는 짧은 리허설을 마치고 식장에서 직접 연주했다.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이자이에게 헌정된 곡이 200곡을 헤아린다. 이 곡은 그가 가장 자주, 그리고 아내 루이즈 부르도가 36 년을 함께 살고 먼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계속 연주했던 곡이다.
● 사랑의 고통(8월 12일) : “사랑하는 이의 손에 죽을 수 있다면 지옥의 고통도 천국의 기쁨이 될 테니”(2막 1장-헬레나)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10 번, Op.96 / 슈만 바이올린 소나타 2 번, Op.121
-베토벤은 ‘불멸의 연인’으로 알려진 안토니 브렌타노와의 사랑이 실패로 끝난 후 침묵과 숙고의 시간을 갖는다. 이 시간의 결과물이 그의 마지막 바이올린 소나타 10번이다. 담담한 회고와 관조, 그리고 희망을 느끼게 하는 곡이다. 실패한 사랑은 열정의 사랑 못지않은 영감의 원천이 된다.
● 뜻하지 않던 이야기(8월 15일) : “내 장미가 이렇게 빨리 시들다니!”(1막 1장-라이샌더)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8 번, Op.30-3 / 멘델스존 바이올린 소나타 F 장조 / 루토스와프스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수비토
-’갑자기’란 뜻의 수비토에서는 이질적 요소가 짧은 길이의 음악 속에 연이어 교차한다. 어떤 면에서는 이국적 매력을 느끼게 하지만 동시에 고약하고 잔인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희한한 일은 수비토의 매력에 빠지면 계속 찾아 듣게 된다는 것이다. 음식으로 따지면 발효 음식과 비슷하다.
● 열정의 밤(8월 17일) : “사랑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니까. 그래서 큐피드는 장님으로 그려지는가 봐”(1막 1장-헬레나)
-차이콥스키 소중했던 곳의 추억, Op.42 / 이자이 바이올린 소나타 3 번 ‘발라드’, Op.27-3 /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3번, Op.108
-차이콥스키는 평생을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연속된 이별 때문에 얻은 우울증으로 고생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전혀 거칠지 않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완벽한 화음과 애타는 선율로 그려낸다. ‘소중한 장소의 추억’의 마지막 곡인 ‘멜로디’는 작곡가가 푸른 풀과 붉은 장미를 보며 우울감을 털어내고 쓴 곡이다. 자연에는 생명과 낭만의 힘이 있다.
-피아니스트, 작곡가, 지휘자로 유명했던 한스 폰 뷜로는 리스트의 딸인 코지마와 이혼한다. 원인 제공자는 바그너였다. 바그너는 코지마와 눈이 맞아 결혼한다. 폰 뷜로는 바그너의 제자이자 추종자였으나 이 일을 계기로 바그너와 대척점에 있던 브람스를 지지하게 된다. 정통 독일 음악의 계보를 3B(바흐, 베토벤, 브람스)라 일컬었던 이는 폰 뷜로였다. 브람스는 그에게 바이올린 소나타 3번을 헌정한다. 작곡가의 고고한 지성과 빼어난 장인 정신이 결합된 걸작이다.
● 아름다운 밤 하늘을 보며(8월 19일) : “나의 사랑이 저 하늘의 빛나는 별들보다 이 밤을 더 아름답게 비추어”(3막 2장-라이샌더)
-슈베르트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D.934 / 슈만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Op.131 / 왁스만 카르멘 환상곡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여러 대목을 이어 엄청난 기교의 편곡으로 만든 왁스만의 카르멘 환상곡. 원래 영화음악으로 만들어졌던 것이 오케스트라 협연의 연주회용으로 확장됐다. 하이페츠가 이 곡으로 세계투어를 하고 녹음도 했다. 그 레코드를 오이스트라흐가 제자인 코간에게 전했다. 코간은 ‘반동적’ 음악을 드러내고 연주할 수 없었으나 후에 콘드라신과 함께 녹음했다. 코간의 제자인 뮬로바는 망명길의 짐 속에 마이크로필름에 담은 악보를 가지고 왔다. 비제의 낭만은 왁스만을 거쳐 뮬로바에 이르는 동안 세월과 철의 장막까지 건넜다.
● 별을 세다(8월 20일) : “별빛으로 그를 알아보겠지”(5막 1장-테세우스)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23번 K.306 / 바이올린 소나타 24번 K.376 / 바이올린 소나타 32번 K.454
-B플랫 장조 소나타 32번의 화려한 1, 3악장과 고요한 가운데 2악장의 구조를 두고 18세기의 음악전문가인 커트버트 거들스톤은 ‘기쁨과 고요의 열쇠’라고 표현했다. 찬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안네-소피 무터는 이 곡을 두고 바이올린 소나타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기념비적 업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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