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서예리 “고음악과 현대음악은 닮은꼴 매력...‘산소통’에 담아 한꺼번에 전달”

‘2022서울국제음악제’서 모차르트·쇤베르크 연주
“서로 이질적 음악 같지만 사실은 유사점도 많아”

민은기 기자 승인 2022.10.22 21:47 | 최종 수정 2022.10.22 21:59 의견 0
소프라노 서예리가 2022서울국제음악제에서 두차례 공연한다. 그는 “코로나 시기를 견딘 모든 사람들에게 산소같은 음악을 전해주겠다”고 밝혔다. ⓒ굿스테이지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코로나 시기를 겪으면서 오랫동안 ‘산소통’ 없이 생활했잖아요. 성악가들은 무대에 못서고, 팬들은 노래를 못들은 시간이 너무 길었어요. 이번에 제 특기인 고음악과 현대음악을 통해 신선한 산소를 공급해 주고 싶어요. 음악 숨통이 트일 겁니다.”

소프라노 서예리가 ‘2022서울국제음악제’(10월 22~30일)를 앞두고 두근두근 기대감을 드러냈다.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는 고음악과 현대음악의 스페셜리스트다. 이번 음악제에서 두 번 무대에 오른다. 19일 서울 종로의 한 커피숍에서 만나자마자 개막공연에서 선보일 모차르트의 ‘미사 c단조’ 이야기를 꺼냈다.

“영광스럽죠. 지금까지 이 곡을 많이 연주했지만 노래할 때마다 마음가짐이 늘 새롭습니다. 팬데믹의 어두운 터널을 빠져 나오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한다고 생각하니 뭉클하기도 하고요. 페스티벌의 주제인 ‘우리를 위한 기도(Pray for us)’에도 딱 들어맞습니다.”

‘미사 c단조’는 ‘그레이트(Great)’라는 별명이 붙어있을 만큼 모차르트의 시그니처 작품이다. ‘대미사’라고도 불린다. 종교음악 형식이지만, 작곡 동기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압도적 절대자에 대한 찬사보다는 콘스탄체 베버와의 결혼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으려고 만들었다. 행복을 갈구하는 인간의 목소리가 들어있어 더욱 공감된다.

“합창 파트는 대부분 엄격하고 엄숙한 분위기지만 독창곡은 오페라 아리아가 생각날 정도로 화려해요. 이런 대조적 스타일 때문에 생명력이 넘치죠. 특히 소프라노는 아주 매력적입니다. 앞부분부터 등장해 이중창, 삼중창, 사중창 등을 부르죠. 독창은 충실하게 저의 해석에 집중할거에요. ‘서예리만의 스타일’ 완성이죠.”

고음악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는 “발성 자체에 비브라토를 넣었다 뺐다하는 테크닉에만 주목하는데 사실은 자유로운 해석이 가능하다”라며 “자세히 들어보면 신나기도 하고 애절하기도 하는 등 모든 게 다 들어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공연엔 ‘든든한 빽’ 2명이 함께 한다. 베이스 바리톤 토마스 바우어는 같은 대학에서 근무하고 있는 20년 지기 동료다. 메조소프라노 김정미는 2018년 서울시향의 바흐 ‘요한 수난곡’에서 호흡을 맞춰봤다. 테너 국윤종과 지휘자 홍석원은 처음이지만 첫 리허설에서부터 찰떡케미를 뽐냈다고 귀띔했다.

소프라노 서예리가 2022서울국제음악제에서 두차례 공연한다. 그는 “코로나 시기를 견딘 모든 사람들에게 산소같은 음악을 전해주겠다”고 밝혔다. ⓒ굿스테이지 제공


“일반적으로 고음악과 현대음악은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일맥상통한 부분이 많아요. 고음악에 현대적 신선함이 발견되기도 하고, 현대음악에 전통적인 내용이 숨어있기도 합니다. 두 분야는 전혀 별개가 아니에요.”

감상팁도 알려줬다. “고음악은 아름답고 깨끗하게 들리고, 현대음악은 드라마틱하거나 때로 기괴하게 들린다”라며 “하지만 귀를 활짝 열면 닮은꼴을 쉽게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서예리는 독특한 음악가다. 16~18세기 바로크 음악으로 대표되는 고음악(르네상스·바로크·고전파를 모두 포함하는 음악)은 물론이고 지금 막 태어난 21세기 작품까지 거뜬히 소화해 낸다. 흔치 않은 케이스다. 그는 “한곳에만 편중하지 않으려고 공연을 조절한다”며 “고음악, 스탠더드음악, 현대음악을 각각 3분의 1씩 연주한다”고 했다. 곱씹어보면 만능 플레이어인 셈이다.

그는 22일 개막음악회에 이어 28일 실내악 시리즈에도 출연한다. 여기서 선보일 곡은 오스트리아 작곡가 쇤베르크의 ‘달을 쏘아올린 피에로’다. 지난해 8월 평창대관령음악제에서도 연주해 브라바 갈채를 받았다.

“현대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늘 실험적인 곡에 도전하는 걸 즐겨요. 한국에서는 다소 어렵다는 이유로 잘 연주되지 않는 현대음악을 소개하는 데 책임감도 느끼고요. ‘달을 쏘아올린 피에로’는 쉴 새 없이 떠들어대야 하는데, 한마디로 ‘말로 하는 노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독일어 가사를 제대로 표현하기 쉽지 않아 국내외에서 자주 연주되지 않는 것 같아요.”

이 작품은 벨기에 시인 알베르 지로의 연작시 중 21편에 곡을 붙여 만들었다. 몽환적이고 서정적이다. 연주 시간은 모두 48분 안팎이다.

소프라노 서예리는 고음악과 현대음악 두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다. 사진은 서예리의 공연 모습. ⓒ서예리 제공


서예리는 “인간 내면의 불안, 욕망, 강박증, 폭력 등을 담은 내용의 가사에 왈츠, 소나타, 푸가 등 아름다운 기법이 더해졌다”며 “풍자와 시사 속에 깃든 슬픔, 외로움, 비극, 우울도 떠올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맑은 음색과 정확한 음정, 또렷한 발음, 학구적인 해석 등을 갖춘 성악가만이 해낼 수 있는 언터처블 레퍼토리다.

성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재미있다. 지금은 ‘소프라노 서예리’지만 처음엔 ‘피아니스트 서예리’였다. 예원학교 2학년 2학기 때 소프라노 친구의 반주를 맡게 됐다. 헨델의 오페라 ‘이집트의 줄리오 체사레’에 나오는 ‘V’adoro, pupille(사랑하는 그대 눈동자)’였다.

“피아노를 치는데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라고요. 그리고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했어요. ‘성악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갑자기 필이 확 느껴졌습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친구는 ‘너 소리가 있어. 성악해’라고 말했죠.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느끼지 못했던 뜨거운 것이 가슴을 뛰어다녔어요.”

당연히 엄마는 반대했다. 피아노 연습하기 싫어 꾀까지 부린다고 꾸중했다. 하지만 자식 이길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단식투쟁 끝에 3학년이 되면서 성악으로 전공을 바꿨고 서울예고로 진학했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셀프 증명했다.

서예리는 좋은 스승을 많이 만났다. 행운처럼 보이지만 실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서울대 졸업 후 스물네살에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베를린 국립음대에서 공부했다. 어느날 학생 신분으로 르네 야콥스의 마스터 클래스에 참가했는데 덜컥 발탁됐다. 2003년 인스부르크 고음악 페스티벌에서 몬테베르디 ‘오르페오’의 닌파 역으로 데뷔했다. 큰 역할은 아니었지만 이게 성장의 엔진이 됐다.

인스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여러 대가를 만났다. 그분들의 조언에 귀 기울이며 자신을 업그레이드 할 결심을 굳혔다. ‘그래 한번 제대로 배워보자’ 마음을 다잡고, 스위스에 있는 고음악 전문대학인 바젤 스콜라 칸토룸에서 고음악의 ABC를 배웠다.

소프라노 서예리는 고음악과 현대음악 두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다. 사진은 서예리의 공연 모습. ⓒ서예리 제공


바로크 악기의 명수 ‘쿠이켄 삼형제’ 중 둘째였던 시기스발트 쿠이켄도 잊을수 없는 스승이다. 그는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의 경지에 오른 후 지휘자로도 활약했다. 서예리는 “선생님은 한국 소주를 특히 좋아했다”고 말했다.

현대음악의 상징과도 같은 피에르 불레즈와의 추억을 이야기할 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2010년이다. 불레즈의 85세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그의 70분짜리 대작 ‘플리 슬롱 플리’를 불렀다. 공연이 끝난 뒤 블레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서예리의 목소리로 내 곡이 연주되는 것이 영광이다”라며 극찬을 보냈다. 그 후 루체른 페스티벌과 BBC 등 그의 곡의 연주되는 콘서트에 늘 서예리를 무대에 세웠다.

“성악에 대한 생각이 저와 같다는 것에 대해 놀랐어요. ‘맨 마지막에 하이E를 내야하는데도 노래하는 게 아주 편했다’고 하자 아주 행복해하셨죠. 선생님은 혹독하게 가르쳤어요. 늘 정확함을 요구했고요. 리허설 때 의자를 던지는 것을 본 적도 있어죠. 그런데 저를 유독 예뻐하셨어요. 저 칭찬 많이 받았습니다.”

조르주 사발이 무릎 꿇은 비하인드 스토리도 공개했다. “파리 필하모닉과 함께 하이든의 ‘천지창조’를 연주했는데 갑자기 바닥에 털썩 무릎을 댔다"라며 “깜짝 놀라 당황해하고 있는데 ‘정말 잘했다’라며 박수를 쳐주었다”고 털어놨다.

소프라노 서예리가 2022서울국제음악제에서 두차례 공연한다. 그는 “코로나 시기를 견딘 모든 사람들에게 산소같은 음악을 전해주겠다”고 밝혔다. ⓒ굿스테이지 제공


서예리는 20여년간 머물던 베를린을 떠나 2019년부터 현대음악의 메카로 불리는 다름슈타트에서 살고 있다. 윤이상과 백남준도 여기에서 이름을 떨쳤다. 그는 다름슈타트 시립음대 정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연주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제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성악과 교수가 됐을 때입니다. 한국 사람 최초의 외국대학 성악과 교수라는 타이틀도 영광이지만 그 동안의 노력이 보답 받은 것 같아 정말 기뻤어요. 오페라나 가곡 등의 가사가 독일어로 되어 있다고 해서 독일 사람들이 꼭 노래를 잘하는 건 아닙니다. 기본 발성 이외에 명확한 발음 능력과 음악적 표현력이 중요한데, 저의 그런 능력이 인정을 받아 행복해요.”

그는 개인 연주뿐만 아니라 후학 양성에도 관심이 많다. 신인 연주자를 꾸준히 발굴해 소개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열린 ‘소프라노 서예리와 바로크 프로젝트’에서도 후배들에게 기회를 줬다.

"저도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런 제 경험을 나누고 싶어요. 능력 있는 연주자를 발굴해 키우고 싶은 꿈이 있어요. 제가 해야 할 역할이죠."

소프라노 서예리는 고음악과 현대음악 두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다. 사진은 서예리의 공연 모습. ⓒ서예리 제공


서예리는 다음 스케줄도 밝혔다. 11월 8일 국립합창단과 함께 ‘바흐 b단조 미사’를 공연한다. 미국 합창 음악계의 거장인 닥터 얼 리버스가 지휘한다. 그리고 내년엔 파리에서 피에르 불레즈 오마주 공연에 참가한다. 세계 최정상 현대음악 연주단체로 꼽히는 앙상블 앵테르콩탱포랭이 함께한다.

“오로지 연습만이 힘입니다. 실력이 최고의 무기입니다. 늘 갈고 닦아 틈을 보이지 않아야해요. 소원이 있어요. 죽는 순간이 온다면, 그 장소가 무대였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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