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바람소리도 새소리도 ‘협연’...서울 한복판 150년 고택에 흐른 클래식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시그니처콘서트 성황
북촌 윤보선고택서 4개팀 못잊을 추억 선사

민은기 기자 승인 2023.05.05 16:47 | 최종 수정 2023.05.06 13:30 의견 0
서울 안국동 윤보선 고택에서 1일 열린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서 최나경(플루트)과 박규희(기타)가 듀오 연주를 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종로구 안국동 북촌에 있는 윤보선(1897~1990) 전 대통령의 고택은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옥이다. 지어진지 150여년쯤 됐는데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438호)다. 윤 대통령의 장남 가족이 현재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사람들의 입장이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봄마다 문이 살짝 열려 싱그러운 실내악이 울려 퍼진다.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예술감독이 18년째 이끌고 있는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SSF)에서 2006년부터 시작한 고택음악회가 열린다. 처음엔 후원 회원들만 알음알음 초대했는데, 2015년부터 일반 청중에게도 개방했다. 티켓을 오픈하면 가장 먼저 솔드아웃되는 SSF의 ‘시그니처 콘서트’가 됐다.

음악회가 열리는 곳은 ‘산정채’라고 불리는 바깥사랑채다. 집 안에 있지만 산속의 별채와 같다는 뜻에서 산정(山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유천희해(遊天戱海)’라는 큼지막한 편액이 걸려 있다. ‘하늘과 바다 위에서 노닐고 춤춘다’는 의미다. 동양에서 복을 의미하는 박쥐의 모양으로 ‘태평만세(泰平萬歲)’라고 새긴 현판도 눈에 띈다. 산정채 앞에 간이무대를 만들고, 관객들은 그 앞뜰에 앉아 공연을 즐긴다.

1일 오후 5시. 더할 나위 없이 쾌청한 날씨 속에 고택음악회의 막이 올랐다. 올해는 이곳에서 두 번의 야외음악회를 준비했는데, 첫 번째 공연 ‘균형잡기(Antidote)’가 열린 것. 19세기 초 고전주의 작곡가들(줄리아니, 베토벤)과 20세기 프랑스 작곡가들(프랑세, 라벨)의 작품이 한데 어우러져 멋진 대비를 이뤘다. 두 번째 공연은 5일 ‘가든 콘서트(Garden Concert)'라는 제목으로 개최된다. 만약 비가 내리면 고택 앞에 있는 안동교회로 자리를 옮겨 진행한다.

서울 안국동 윤보선 고택에서 1일 열린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서 최나경(플루트)과 박규희(기타)의 듀오 연주에 앞서 최나경이 곡을 설명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첫 주자로 플루티스트 최나경과 기타리스트 박규희가 등장했다. 두 사람은 19세기 이탈리아 기타 음악을 대표하는 미우로 줄리아니의 ‘플루트와 기타를 위한 그랜드 세레나데(Op.82)’를 연주했다. 베토벤은 줄리아니의 공연을 보고 “기타는 그 자체가 작은 오케스트라다”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서울스프링실내악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아티스트가 직접 곡을 해설한 뒤 연주를 하는 것. 최나경은 “얼떨결에 마이크를 잡았다. 스릴 있는 라이브 콘서트다”라고 분위기를 띄운 후 “아름다운 공간에서 특별한 공연을 열게 돼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1악장은 사랑스러운 플루트 주제로 시작해, 여기에 기초한 세 개의 변주가 이어졌다.듀엣곡인데 나무를 가볍게 흔드는 바람소리가 슬쩍 들어와 트리오를 이뤘다. 바람도 음악회에 꼭 끼고 싶었나보다. 2악장은 고전주의적 우아함이 돋보이는 미뉴에트다. 바람이 빠지니 이번엔 새들의 지저귐이 가세해 새로운 스타일의 삼중주가 됐다.

3악장은 ‘알레그로 브릴란테’라는 지시처럼 화려하다. 하지만 과하지 않게 기교가 적당한 수준으로 절제돼 있다. 새들도 수시로 날아들며 관심을 보였다. 4악장은 행진곡. 기타가 플루트에 자리를 내주는가 싶더니, 플루트가 다시 기타에 자리를 양보하는 등 둘의 케미가 빛났다. 최나경은 “이 악장은 행진곡이지만 군대의 행진이 아니다. 미니 병정들의 행진이다. 어린이들이 깡충깡충 걷는 느낌을 준다. 귀엽다”며 “비르투오소적 기교가 가득해 연주자들의 손가락이 무척 바쁘다”고 말했다.

윤보선 고택에서 1일 열린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서 로망 귀요(클라리넷), 비욘 레만(피아노), 조영창(첼로)이 3중주를 선보이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다음은 로망 귀요(클라리넷), 조영창(첼로), 비욘 레만(피아노)이 배턴을 이어 받아 베토벤의 ‘클라리넷 3중주 내림B장조(Op.11)’를 들려줬다. “안녕하세요”라고 한국말로 가볍게 인사를 건넨 로망 귀요는 “이 3중주에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음악이라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 들어 있다”고 설명했다.

뛰어난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프란츠 요제프 베어의 의뢰로 작곡됐다. 베어는 작곡을 요청했을 뿐만 아니라 3악장의 주제를 제안하기도 했다. 1악장은 베토벤답게 신랄한 대목이 눈에 띈다. 2악장은 첼로가 고음역을 담당하며 전개된다. 3악장은 아홉 개의 변주로 구성돼 있는데 악성의 초기작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 악장이 흐르는 동안 까치 한 마리가 처마에 앉아 오래도록 머물렀다.

피아노는 뵈젠도르퍼를 사용했는데 뚜껑 안쪽을 분홍과 빨강의 카멜리아 꽃으로 새겨 넣은 장식이 눈에 확 띄었다. 피아노에 동백꽃이 활짝 핀 셈이다. 야외 공연이다 보니 변수가 많다. 악보가 바람에 날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도록 자석이 붙은 보면대를 사용했다. 아직 햇볕이 강해 피아니스트의 얼굴을 직격해 눈을 찡그리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피아노 위치를 살짝 틀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찬 기운이 올라왔다. 첼로 연주자의 손이 곱아 입김을 훅훅 불어 넣었다. 공연 외적인 변수를 보는 장면도 쏠쏠하다.

윤보선 고택에서 1일 열린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서 올리비에 두아즈(오보에), 김규연(피아노), 로랭 르퓌브레(바순)이 3중주를 선보이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장 프랑세는 어렸을 때 생상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반드시 이 대작곡가의 뒤를 잇겠노라고 맹세했다고 한다. 그는 라벨의 격려와 추천을 받아 나디아 블랑제에게 배웠다. 고전적 양식을 존중하며 재치와 기품이 돋보이는 작품들을 남겼다. ‘오보에, 바순과 피아노를 위한 3중주’는 말년에 완성된 걸작이다. 올리비에 두아즈(오보에), 로랭 르퓌브레(바순), 김규연(피아노)이 연주했다.

김규연은 “야외에서 샴페인 한 잔하며 들을 수 있는 안성맞춤 곡이지만 연주자에게는 혹독한 곡이다”라며 “너무 어려워 오늘도 리허설 후 3시에 호텔로 돌아가 연습하다 왔다”고 고백했다. 그리고는 “가성비가 떨어지는 곡이다. 작곡가가 돼지처럼 연주하라고 했다는데 4악장에서 적토마처럼 달려보겠다”고 웃음 유발 멘트를 날렸다.

윤보선 고택에서 1일 열린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서 김규연(피아노), 올리비에 두아즈(오보에), 로랭 르퓌브레(바순)이 3중주를 연주하기에 앞서 김규연이 곡을 설명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1악장에서 오보에 연주자는 귀여운 몸동작으로 분위기를 띄웠고, 2악장에서는 피아노가 쉴 새 없이 줄달음치는 가운데 두 목관악기의 자유롭고 익살스러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3악장이 시작되기 전 오보에 연주자는 악기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구멍에 바람을 훅훅 불어 넣거나 닦아내며 소리를 다듬었다. 그 후에 전달된 오보에 소리는 굿이다. 바순 소리도 굿이다. 두 노인이 양지바른 곳에서 나누는 한담 같았다. 4악장은 프랑세 특유의 재치가 넘쳤다. 수시로 곡을 끝마칠 것처럼 하다가는 다시 이어지는 능청을 부렸다.

윤보선 고택에서 1일 열린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서 데이빗 맥캐롤(바이올린), 문지영(피아노), 게리 호프만(첼로)이 3중주를 연주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피날레 곡은 모리스 라벨의 ‘피아노 3중주 a단조’. 작곡가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직전에 작곡했다. 유언과도 같은 작품이다. 바이올리니스트가 곡 해설을 한 뒤 문지영(피아노), 데이빗 맥캐롤(바이올린), 게리 호프만(첼로)이 호흡을 맞췄다.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의 모데라토(1악장)를 지나 생동감 있고 익살스러운 스케르초(2악장)가 계속됐다. 3악장은 어둡고 신비로운 분위기였고, 4악장은 재즈 리듬이 연상되는 론도 형식이었다. 묵직한 첼로 선율과 가녀린 바이올린 소리에 비둘기는 아예 바닥에 내려 앉아 감상했다.

윤보선 고택에서 1일 열린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서 데이빗 맥캐롤(바이올린), 문지영(피아노), 게리 호프만(첼로)이 3중주를 연주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주최측의 세심한 배려도 브라보 브라바였다. 한국적 전통미 가득한 방석을 하나씩 나눠줘 편안한 감상을 도왔고, 건강을 가득 담은 웰컴 드링크와 간식도 준비해 출출함을 달래주는 센스가 돋보였다. 돌아가는 길에도 한 끼 식사로 거뜬한 도시락을 예쁜 보자기에 정성스럽게 싸 선물로 줬다. 귀도 만족스럽고 입도 만족스러운 고택음악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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