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보석 같은 6중주 소개...서로 등 두드리며 격려 ‘흐뭇한 전우애’도 추가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개막공연 ‘6중주 팡파르’
해설 곁들인 다채로운 섹스텟 선보여 박수갈채

박정옥 기자 승인 2023.04.29 20:27 | 최종 수정 2023.05.01 11:13 의견 0
26일 개막한 제18회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서 문지영·한수진 등으로 구성된 6중주 팀이 리스의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를 연주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SSF)의 특징 중 하나는 연주자가 직접 곡 해설을 한다는 점이다. A부터 Z까지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간단하게 소개하는 자리지만, 임무를 맡으면 부담스럽다. 막판까지 누가 마이크를 잡을지 치열한 눈치싸움을 벌이기 일쑤다. 말솜씨 좋으면 자발적으로 OK 외치며 나서겠지만, 대부분은 바닥을 내려 보며 누군가 손을 들어주기를 기대한다. “제발 나만 피해가라” 조마조마 가슴을 졸인다.

또 하나의 특징 중 하나는 ‘보석의 발견’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실내악 음악의 숨은 명곡을 들려준다. 올해로 18년째 페스티벌을 이끌고 있는 강동석 예술감독은 “SSF는 꼬박 1년이 걸린다. 페스티벌이 끝나면 바로 다음날 내년 축제 준비를 시작한다. 가장 중요한 일이 연주자 섭외, 그 다음이 새로운 곡을 찾아내 레퍼토리를 정하는 것이다. 요즘은 인터넷과 유튜브 덕분에 새로운 곡을 찾는 게 수월하지만, 여전히 힘든 작업이다”고 토로했다.

제18회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서 비올리스트 김상진이 모차르트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대6중주’를 소개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낯선 곡을 연습해야 하지만 연주자들도 ‘신상 실내악’을 기다린다. 첼리스트 강승민은 “올해는 어떤 곡이 나올까 나름 예상 답안지를 미리 작성해보기도 한다”면서 “처음 들어보는 작곡가, 신선하고 충격적인 곡을 만나면 짜릿하다”고 밝혔다.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 역시 “꽁꽁 숨어있는 곡을 만나는 즐거움이 크다”며 “동료들의 음악에 귀 기울이면 행복감이 저절로 밀려온다”고 거들었다.

제18회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가 26일 세종체임버홀에서 개막됐다. 올해의 주제는 ‘다다익선: The More, The Merrier!’다. ‘많을수록 즐겁다!’는 테마에 걸맞게 실내악 편성 중 평소 만나기 힘든 6중주, 7중주, 8중주의 대편성 연주회를 마련했다. 오는 5월 7일까지 세종문화회관 세종체임버홀,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윤보선 고택 등에서 펼쳐진다. 66명의 연주자가 참여해 12일간 14회의 공연을 준비한다.

26일 개막한 제18회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서 에르베 줄랭이 '알프호른 팡파르 Ⅰ’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관객들은 개막 공연 ‘6중주 팡파르(Sextet Fanfare)’에서부터 누가 마이크를 잡을지, 어떤 숨은 명곡이 나올지 궁금했다. 지난 3년간 세계를 휩쓸었던 코로나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힘찬 새 출발을 하게 됐음을 우렁차게 알리는 의미로 팡파르라는 제목을 붙였다.

1부 첫 등장부터 볼거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길이가 3m쯤 되는 매머드 사이즈의 악기가 나왔다. 알프스 지역과 비슷한 유럽 산악지대에서 전해 내려오는 민속악기인 알프호른이다. 구멍이나 밸브가 없는 단순한 모양새지만 그만큼 소리 조절이 쉽지 않아 보인다.

에르베 줄랭은 자신이 작곡한 ‘알프호른 팡파르 Ⅰ’을 직접 연주하며 음악회의 문을 열었다. 연주 중간 숨을 골라야 할 정도로 엄청난 폐활량이 필요한 악기다. 알프스 계곡을 지나는 청량한 기운이 콘서트장을 가득 채웠다. 간접 알프스 투어를 다녀온 셈이다.

26일 개막한 제18회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서 이한나·김규연 등으로 구성된 6중주 팀이 투리나의 ‘비올라, 피아노와 현악 4중주를 위한 안달루자'를 연주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다음 곡은 호아킨 투리나의 ‘비올라, 피아노와 현악 4중주를 위한 안달루자(Op.7)’. 기본 현악 4중주(바이올린 김소옥, 바이올린 양정윤, 비올라 심효비, 첼로 김가은) 포맷에 비올라(이한나)와 피아노(김규연)를 더한 6중주다. 투리나는 알베니즈, 그라나도스, 파야와 함께 20세기 스페인을 대표하는 작곡가다.

비올리니스트 이한나가 첫 해설자로 나섰다. “투리나는 프랑스에서 유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초기에 프렌치 스타일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며 “하지만 알베니즈와 파야의 조언을 받아들여 점차 자신의 음악에 스페인적 요소를 받아들였고, 이 곡은 음악 양식이 스페인적으로 변화하는 시기에 작곡됐다”고 말했다. 선율과 리듬에서 스페인 형식을 찾아내는 게 감상 포인트다.

이한나·김규연 등으로 구성된 6중주 팀이 투리나의 ‘비올라, 피아노와 현악 4중주를 위한 안달루자'를 연주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1악장은 피아노 전주로 시작해 사랑하는 연인에게 보내는 두 개의 세레나데로 구성됐다. 먼저 피아노와 약음기를 끼운 현악 4중주의 은은한 반주 위로 독주 비올라가 노래하다가 기타를 연상시키는 피치카토로 끝맺었다. 다음은 스페인적 리듬과 함께 세레나데가 출발하고 감미로움과 열정이 교차하며 스페인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선율로 이어졌다.

연인의 대화를 묘사한 2악장은 뜨겁게 시작됐다. 현악 4중주는 더 적극적으로 노래하고, 1악장과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사랑 고백과 정열적 감정의 분출이 교차했다. 1악장의 주요 소재들이 2악장 전반에 자주 등장해 작품의 통일성을 이뤘다. 스페인이 관객 가슴으로 훅 들어왔다.

제18회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서 강동석·김상진 등으로 구성된 6중주 팀이 모차르트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대6중주’를 연주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신포니아 콘체르탄테’는 협주 교향곡이라는 뜻이다. 복수의 독주 악기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오케스트라와는 다른 주제를 연주한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협주곡과 구별된다. 이 장르를 대표하는 작품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1779년에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해 쓴 ‘K.364’다. 이 곡은 20여년간 출간되지 못한 채 소수의 필사본으로만 전해져 오다가 1802년에 처음 출판됐다. 그런데 뒤늦게 세상에 나왔음에도 큰 인기를 끌었다. 네 손을 위한 피아노 버전과 피아노 3중주 버전이 같은 해에 연이어 나왔을 정도다.

그리고 1808년에 현악 6중주 버전이 나왔다. 바이올린 강동석·양정윤, 비올라 김상진·이한나, 첼로 최하영·김가은이 호흡을 맞춰 바로 이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대6중주’를 연주했다. 제1바이올린(강동석)과 제1비올라(김상진)가 원곡과 마찬가지로 독주를 맡았고, 다른 네 파트는 이를 반주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제18회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이 모차르트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대6중주’를 소개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강동석·김상진 등으로 구성된 6중주 팀이 모차르트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대6중주’를 연주한 후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강동석이 곡을 간단히 소개한 후 “비올라 파트가 큰 역할을 담당한다”며 김상진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한 마디를 덧붙인 김상진은 다시 이한나에게 마이크를 떠넘겼다. 이한나는 “최하영 첼리스트에게 마이크를 넘기면 부담스러울 것 같으니 여기서 끝내겠다”며 마이크 계주를 스톱하는 센스를 발휘해 웃음을 안겨줬다.

1악장에서는 당당하고도 폭넓은 표현이 두드러졌다. 음악을 통해 서로 마음을 주고 받는 모습이 명랑했다. 구슬픈 느낌의 2악장에서는 두 독주악기의 소곤소곤 밀회가 인상적이었다. 김상진의 비올라는 서글펐다. 3악장에서 두 악기는 한층 풍부해진 짜임새 속에서 장식음을 마음껏 구사하며 현란한 연주를 뽐냈다. 활력이 넘쳤다.

제18회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서 김규연 등으로 구성된 6중주 팀이 풀랑의 ‘피아노와 관악 5중주를 위한 6중주'를 연주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2부가 시작됐다. 프랑시스 풀랑은 20세기 초에 활동한 프랑스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다. 미요, 오네게르 등과 함께 이른바 ‘6인조’의 멤버였다. 그는 오케스트라 악기로는 현악기를 좋아했지만, 독주악기로는 더 다채로운 색감을 내는 목관악기를 선호했다.

‘피아노와 관악 5중주를 위한 6중주(FP.100)’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작품이지만 특유의 번뜩이는 재치와 깊은 감성이 결합된 걸작이다. 통상적인 관악 5중주는 흔한 편이지만 여기에 피아노가 가세한 6중주는 드물다.

김규연(피아노)과 함께 윤혜리(플루트)·올리비에 두아즈(오보에)·로망 귀요(클라리넷)·로랭 르퓌브레(바순)·에르베 줄랭(호른)이 팀을 이뤘다. 김규연은 “벨에포크 시대의 곡이다. 영화 ‘마드나잇 인 파리’의 향취가 가득하다. 산업화에 따른 불안감도 엿보이고, 세기말적 허무감도 극대화돼 있다. 그것을 감내하려는 노력과 퇴폐, 관능, 집착도 공존한다. 천진난만, 우울, 쾌활도 뒤섞여 있다”고 말했다.

제18회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서 피아니스트 김규연이 풀랑의 ‘피아노와 관악 5중주를 위한 6중주'를 소개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제18회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서 김규연 등으로 구성된 6중주 팀이 풀랑의 ‘피아노와 관악 5중주를 위한 6중주'를 연주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1악장을 여는 토카타풍의 빠른 악상부터가 신고전주의의 영향이 잘 드러나 있다. 모든 악기가 이 악상을 힘차게 연주한 뒤, 목관은 짤막하고 익살스럽게 달리고 피아노는 이를 강렬한 리듬으로 서포트했다. 중간부에서 바순은 서정적이고 달콤한 선율로 노래해 분위기를 전환하고 다른 악기들이 바뀐 무드를 이어갔다. 다시 처음의 강렬하고 빠른 대목으로 돌아가 악장을 마친다.

2악장을 여는 오보에의 서정적 선율은 풀랑이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K.545’를 자기 스타일로 다듬은 것이다. 중간부 익살스러운 대화를 나누는 목관들을 거쳐 다시 첫머리의 서정적 파트로 돌아온다. 김규연은 곡 소개에서 이 부분을 “팝아트의 느낌이 난다. 팝콘이 떨어지며 비누방울로 변하는 모습이 연상된다”고 감각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피날레 3악장은 상당히 자유롭게 처리된 론도다. 리드미컬한 대목과 서정적인 대목이 번갈아 나타나다가 한껏 고양된 분위기로 끝을 맺는다.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선율과 생생한 리듬, 쾌활한 화성이 탁월한 기교와 결합된 ‘피아노와 관악 5중주를 위한 6중주’는 풀랑의 작품 가운데서도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서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이 리스의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를 해설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페르디난트 리스는 베토벤의 제자 겸 친구였지만, 그 자신도 뛰어난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로 19세기 전반기에 유명했다. 워낙 베토벤이 거물이었기 때문에 스승의 이름에 가려 빛을 못 본 케이스다. 리스가 쓴 ‘피아노와 현악을 위한 6중주 1번(Op.100)’은 그의 개성과 기량을 충분히 보여준다.

이 곡에는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라는 멋진 타이틀이 붙어 있다. 아일랜드의 시인 토마스 무어는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라는 시를 썼고, 이 시에 전통 선율을 결합한 민요는 당시 영국에서 널리 유행했다. 리스는 이 민요를 2악장의 주제로 차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대로 곡 전체의 제목으로도 삼았다. 작곡가는 당대의 빅히트 노래를 인용함으로써 작품의 성공을 노린 마케팅에 활용한 것이다. 영리한 리스다.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은 “베토벤의 흔적이 곳곳에 나타난다. 특히 2악장은 장미가 아름답게 피어나는 악장이다. 문지영 피아니스트의 피아니즘이 빛난다. 3악장은 축제 분위기가 느껴진다. 정말 또 하나의 숨겨진 보석이다”라고 설명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서 한수진 등이 리스의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를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문지영(피아노)·한수진(바이올린)·임홍균(바이올린)·이수민(비올라)·강승민(첼로)·이영수(더블베이스)의 6중주 앙상블은 촉촉한 봄비를 뿌리듯 메마른 가슴을 적셨다. 1악장부터 3악장까지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들었다. 다채로운 6중주의 매력을 선사한 피날레 곡으로 안성맞춤이었다. 6중주에 이어 계속 이어질 7중주(5월 3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와 8중주(5월 7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공연도 기대하게 만들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의 특징 하나를 더 추가해야겠다. ‘전우애’로 뭉친 팀이다. 공연을 앞두고 열린 기자 간담회애서 강승민은 “공연 한 번 하면 마치 10년 치 우정이 한꺼번에 쌓인다”고 말했다. 또한 한수진은 “첫 리허설 때부터 ‘아, 내가 큰 가족 안으로 들어왔구나’라고 느꼈다”고 덧붙였다. 공연을 마치고 퇴장하면서 이들은 서로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했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따뜻하다. 충만한 ‘전우애’를 보기만해도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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