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1. 손가락 감상.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층 객석은 무대를 바라보고 왼쪽부터 A, B, C, D, E로 블록이 나뉘어져 있다. C블록이 정중앙이기 때문에 정말 사운드 자체에 오롯이 집중하고 싶다면 여기에 앉는 것이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피아노 리사이틀의 경우 B블록이 명당에 속한다. 피아니스트의 손가락 모양을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핑거 뷰’ 핫플레이스다.
손열음은 6일 예술의전당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다.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8곡 전곡 앨범 발매를 기념해 전국투어에 나선 것. 1부에서 12번과 11번을, 2부에서 13번과 14번을 연주했다. B블록에 앉은 덕에 손가락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박수와 환호 소리를 받으며 핑크 드레스를 입은 손열음이 걸어 나와 피아노 앞에 앉았다. 두 손을 깍지 끼고 가볍게 손가락을 풀었다. 잠시 동안의 기도 후 스타트했다. 손가락이 미끄럼 타듯 건반 위를 왔다 갔다 하는 테크닉을 직관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손모양이 예뻤다. 멀리서 봐도 단정한 느낌이다.
마침 앞자리에 작곡가 윤일상이 앉았다. 대중가요 작곡가지만 클래식 음악에서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얻고 있으리라. 손열음 공연을 보고 페이스북에 “오늘은 모차르트가 너무나 부러웠어요”라고 글을 남기기도 했다. 관객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멘트다.
#2. 스타인웨이 대신 뵈젠도르퍼. 손열음은 2일(1~6번 연주)에 이어 6일 공연에서도 예술의전당이 보유한 스타인웨이 대신 깊고 묵직한 소리가 특징인 오스트리아 명품 피아노 뵈젠도르퍼를 대여해 사용했다. 가로 157cm, 세로 280cm의 ‘280VC’ 모델이다. ‘Vienna Concert’의 약자를 붙인 이름이 암시하듯 빈의 정통 사운드를 표방하는 피아노다. ‘바흐 해석의 권위자’로 불리는 안드라스 쉬프가 즐겨 사용한다. 지난해 11월 롯데콘서트홀 공연 때도 선택했다. 국내에서는 지휘자 정명훈이 뵈젠도르퍼를 아끼는 것으로 유명하다.
손열음은 보다 풍부한 감성의 모차르트를 전달하기 위해 뵈젠도르퍼를 초이스했다. 스타인웨이가 화려하고 기교적이라면 뵈젠도르퍼는 입체적이고 무겁다. 투명한 음색만 강조하기보다는 페달을 덜 쓰면서 변화와 즉흥성을 자연스럽게 보여줬다. 느린 악장에서는 깊은 서정성이 돋보였다. 1부가 끝난 뒤 손열음은 소리가 살짝 거슬렸나보다. 인터미션 때 조율사가 오랫동안 건반을 두드리며 음을 다듬었다. 뜻하지 않게 띵띵띵 소리를 내는 조율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웠다. 기대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느낌이다.
#3. 두 개의 터키 행진곡. 손열음은 ‘12번 F장조(K.332)’에 이어 두 번째 곡으로 ‘11번 A장조(Op.331)’를 연주했다. 11번의 첫 번째 악장은 주제부가 제시된 뒤 여섯 번 변주된다. 두 번째 악장은 미뉴에트와 트리오로 진행된다. 시그니처 악장인 3악장은 ‘알라 투르카(Alla turca)’, 즉 ‘터키풍·터키식으로’라는 지시어가 붙어있어 ‘터키 행진곡’(국가 이름이 튀르키예로 바뀌었으니 이제 ‘튀르키예 행진곡’이라도 불러야 할 듯)이라는 애칭이 붙어있다. 튀르키예의 군악대 리듬을 모방해 이국적이고 경쾌하다.
“모차르트는 저의 모국어이자 손과 마음의 중심에 있는 작곡가예요. 최근 몇 년간 새로운 레퍼토리를 찾아 공부한 것도 재미있었지만, 다시 모차르트로 돌아오니 집에 돌아온 것 같고 자유를 얻은 듯 너무 좋았어요.” 앨범 발매 기자간담회에서 손열음은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를 이렇게 표현했다. 짙은 초록 드레스를 입고 2부에서 연주한 ‘13번 내림B장조(K.333)’와 ‘14번 c단조(K.457)’도 자유롭게 날아 다녔다. 5월에 어울리는 동심을 닮은 곡이다.
몇차례 커튼콜 뒤 손열음이 마이크를 들고 나왔다. “스승 아리에 바르디(하노버 국립음대 교수)께서 앙코르는 4분을 넘기지 말라고 했는데 오늘은 4분을 넘겨야겠다”라며 프로그램북에 나와 있는 마지막 곡 14번 c단조와 어울리는 ‘판타지 c단조(K.475)’를 터치했다. 거의 12분에 육박하는 곡이다. 이 정도면 계를 탄 셈이다.
하지만 결정적 앙코르는 더 남아 있었다. 몇 번 더 퇴장과 입장을 반복하며 관객에게 고개를 숙여 인산한 뒤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손열음은 아르카디 볼로도스가 편곡한 ‘터키 행진곡’을 연주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저만치 나갔던 일부 관객은 부랴부랴 다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2020년 MBC 예능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 출연해 선보였던 곡이다. 특히 건반 뚜껑에 ‘열일하는’ 손열음의 손이 비쳐 마치 네 손이 숨가쁘게 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엄청난 속도감이다. 새 별명을 얻었다. ‘콘찢녀’다. 콘서트장을 찢고 나온 여자다.
#4. 아주 특별한 앙코르. 손열음은 원주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원주 치악예술관은 그에게 아주 특별한 장소다. 1995년도에 처음 정식 리사이틀을 열었던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이번 전국 투어에 자신의 고향인 원주를 넣었고, 지난 3일 치악예술관에서 7번, 8번, 10번, 9번 순서로 모차르트를 들려줬다.
손열음은 이날 공연이 많이 아쉬웠다. 첫 앙코르가 끝나고 공연장 조명이 ‘갑자기’ 켜졌다. 관객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바람에 준비했던 앙코르곡을 다 선보이지 못했다. 사인회 직후 지난해 송년음악회를 열었던 원주 큰나무교회로 달려갔다. 유튜브 채널을 통해 앙코르 연주를 계속 진행한 것.
그는 “28년전 첫 정식 리사이틀 곡이었던 모차르트 ‘d단조 판타지(K.397)’을 꼭 하고 싶었다”며 “연주하지 못한 아쉬운 마음에 교회로 달려 와 영상을 찍는다”고 했다.
이어 독일 시인 ‘뤼케르트’의 시에 슈만이 곡을 붙인 가곡을 리스트가 피아노 소품으로 편곡한 ‘헌정’도 들려줬다. 이것도 앙코르로 준비했던 곡. 뤼케르트의 시 중 “당신은 나의 고통 / 당신은 내가 살고 있는 세상 / 당신은 나의 천국 / 내 모든 아픔 고통이 있는 무덤” 등의 대목을 인용하며 무대에서 팬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살짝 울먹이기도 했다. 손열음은 “저를 위해 오랜 시간 응원하고 기도해주신 우리 동네의 관객분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헌정’이라는 곡을 연주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영상을 본 누리꾼들은 “이 곡을 공연장에서 못쳐서 얼마나 아쉬웠을까요” “이렇게 감동을 주시면 반칙입니다. 저 오늘 잠못잡니다. 멘트도, 연주도” “열음 씨와 동시대에 산다는 것이 너무 큰 축복이네요” “울먹이며 곡을 설명하는 모습이 복합적 감정을 말해주는 것 같다” “95년 ‘판타지’를 기억하는 1인으로 펑펑 운다”는 등의 글을 남겼다.
/park72@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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