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수 “새로운 곡 연습때 음반 안들어...악보만 보면서 작곡가 생각 느껴”

세상 떠난 피아니스트 아내 대신해 특별공연
???????“테크닉 넘어 영감으로 연주...연습·열정 중요”

손민수 객원기자 승인 2023.07.14 16:18 | 최종 수정 2023.07.21 18:35 의견 0
바이올리니스트 김응수는 최근 세상을 떠난 피아니스트 아내를 대신해 무대에 섰다. ⓒ김응수 제공


[클래식비즈 손민수 객원기자(음악칼럼니스트)] 얼마 전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공연을 봤다. 카메라타 솔의 ‘사계’였다. 이 무대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김응수는 눈이 번쩍 뜨이게 한 사람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지난 6월초에는 같은 장소에서 베르누스 무지카의 공연을 감상했다. 여기에서 한국에는 처음 공연된 라트비아의 중견 작곡가 페테리스 바스크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디스턴트 라이트(Distant light)’를 김응수가 연주하는 것을 또 보게 됐다. 그의 강렬함과 섬세함이 교차되는 연주를 보면서 저 연주자의 내면이 궁금해졌다. 단박에 연구실로 찾아갔다. 그는 현재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긴 시간동안 대화를 나눴다.

-한국에는 언제 귀국했나.

“제가 2012년도에 한양대학교에 부임하게 되면서 귀국하게 됐습니다.”

-학교생활과 연주자 생활을 병행하는 데 어려움은.

“특별히 어렵지는 않지만 해외에서 연주자 생활만 할 때와는 다르게 약간의 괴리감이 드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또한 연결점이 있는 부분도 있기에, 그 연결점을 찾는 중에 저 자신과 학생들에게도 도움을 주고자 ‘카메라타 솔’을 만들게 됐습니다.

-이번에 베르누스 무지카와 페테리스 바스크의 ‘Distant Light’ 초연을 했다. 연주자로서 작품에 대한 생각, 연주소감 등 관련된 이야기를 부탁한다.

“굉장히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작품이라는 기준은 두 가지를 말할 수 있어요. 연주자로서 연주하며 좋다고 느낀 것과 연주자로서 좋다고 느낀 곡을 가져다 연주하는데 관객과의 접점을 찾을 수 없다면 굉장히 어려운 작품이 될 텐데 두 가지를 다 갖춘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이 빛이라고 하는 단어 자체가 저한테 사실 굉장히 와 닿았어요. 바스크스 작곡가 이 분이 목사님 아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빛으로 많이 표현합니다. 그래서인지 ‘머나먼 빛’이라는 것이 다른 면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저한테는 특별히 개인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사실 지난 4월에 제 아내가 소천했어요. 그러다 보니 좀 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나합니다.”

김응수가 피아니스트 채문영과 결혼한 것은 2003년이다. 서울예고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은 유럽에서 유학 생활 중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 서로를 인생과 예술의 동반자로 생각하며 살아온 부부에게 몇 년 전 절망적인 소식이 찾아왔다. 채문영이 암에 걸린 것이다. 지난 4월 유방암으로 소천(향년 45세)한 채문영은 할 일이 하나 있었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기로 한 독주회다. 김응수는 채문영의 공연에 자신이 나섰다. 지난 6월 30일 서울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에서 연주회를 열었다. ‘삶의 흔적(Spuren des Lebens)’을 주제로 20년간 부부로 함께한 삶과 예술의 동반자 흔적을 기렸다.

“저는 새로운 곡을 처음 접할 때 기존의 음반이나 영상을 안봅니다. 미리 음악을 들어버리면 편견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죠. 악보만 보다 보면 작곡가의 생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에 맞는 내 생각은 무엇인지 서로의 접점을 찾아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곡을 처음 접했을 때 작곡가가 빛이라는 부제를 미리 정해놓고 작곡하였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빛이라는 부분에 효과도 있지만 사실 예술은 어떻게 보면 인간의 고뇌, 누군가와의 갈등 이런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내 자신의 고뇌와 갈등 등을 가져다 풀어내다 보면 그 안에 자신의 이야기도 쓰게 되고, 그런 내용들이 일반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많은 부분이 있어서 제게도 많이 와 닿았던 곡입니다. 이번에 처음 연주했는데 이 곡은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종종 연주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작품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응수는 최근 세상을 떠난 피아니스트 아내를 대신해 무대에 섰다. ⓒ김응수 제공


-바스크스의 다른 곡들도 연주나 들어본 적이 있나.

“연주는 처음이었고 제가 음악을 하고는 있지만 음악 듣는 것은 조금 경계하는 편입니다. 어렸을 적에는 많이 듣고 미친 듯이 음반을 모아 지금은 8000장 정도의 음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냥 모은 것이 아니라, 정말 듣고 싶어서 구입했습니다. 그 분의 악보들은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드는데 이 곡이 너무 좋았지만 이 사람의 다른 곡은 어떤지 궁금해서 들으면 또 다른 편견이 생길 수도 있어 찾아 듣지는 않았습니다. 악보가 궁금하긴 한데 이 악보가 전부 렌탈이라서. 이번 연주와 지난 사계들 연주, 막스 리히터, 피아졸라는 약 15년 전인데도 악보만 보았고 곡을 들어보는 것은 첫 리허설 때였습니다. 리히터와 바스크스는 반복에 대해 비슷한 패턴이 있습니다. 바스크스는 발전부에 무언가 조금 더 퍼스널한 부분들이 많이 들어가 있고 리히터의 사계는 비발디에 대한 영감이 조금 더 있게 보였습니다.”

-지난 사계, 12계 때도 좋았지만, 이번 ‘Distant Light’ 연주가 개인적으로는 더 좋았습니다. 미묘한 차이가 있던데 지난 두 연주의 차이를 설명해 줄 수 있나요. 선생님의 연주 스타일에 대해 스스로 평가를 한다면.

“제 연주 스타일에 대한 평가는 제가 뭐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고, 제 연주 스타일에 대해서 정의하는 것도 사실은 굉장히 힘든데 제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면 사실 극적인 것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받아들이기 나름이지만 우리 인생사 자체가 굉장히 극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는 것도, 이후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일련의 과정 중에 배움도 생기고 좌절, 기쁨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견해가 있을 수도 있지만 많은 학문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을 윤택하게 합니다. 종교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뭔가의 고뇌와 갈등 등 인간으로서 가지는. 예를 들어 성경책에 있는 십계명대로만 살 수 있다면 사실 예술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 보니 무엇인가를 위해 서로 간의 고뇌와 갈등을 하고 있는 굉장히 영적인 저는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그래서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극적일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감정의 극대화 또는 셈여림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앞서 말한 그런 여러 감정을 가져다 자연스럽게 담아 조금 솔직하게 풀어갈 수 있는 그런 연주 스타일을 지향합니다.

바이올린의 비루투오조적인 것을 보여주면 조금 더 와 닿을 수 있을 겁니다. 제 자랑이 아니라 바이올린 테크닉이 저한테 특별히 어렵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연습은 하지만 31살 이후로는 파가니니 카프리치오 전곡 연주는 그만두었습니다. 이제 그 곡은 저 개인을 위해 연습하는 걸로 남겨 두었습니다. 바스크스의 곡은 조금 더 테크닉적으로 연주해야 합니다. 바이올린이란 악기에 맞게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를 염두에 두고 작곡된 곡이다 보니 조금 더 비루투오직한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연주자가 즉흥적으로 연주 할 수 있는 테크닉적인 부분들이 꽤 많습니다.”

-이번 연주에서 아쉬운 점은 없는지.

“연주가 끝나고 아쉬운 점이 없다고 한다면.(웃음) 아무리 만족해도 아쉬운 점은 당연히 있죠. 저 자신에게 아쉬웠던 거는 조금 더 극적일 수 있는 부분들을 다른 연주자들도 새로운 곡이다 보니, 아무래도 바이올린 솔로가 주가 되는 협주곡이다 보니 지휘자인 최혁재 선생님과 많은 부분을 함께 작업을 했습니다. 저는 한국 연주자들뿐만이 아니라 외국 연주자들에게도 아쉬운 점이 무엇인가 하면 이 곡에 대한, 음에 대한 영감들이 조금 아쉽습니다. 단순히 악보에 표기된 표현 외에도 음 하나하나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가 오가면 조금 더 나은 아이디어가 나올 것이라 봅니다. 그런 부분이 조금 아쉽습니다. 사실 리허설을 세 번 했는데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앞선 질문에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과 연주자 생활 사이에 괴리감이 있다고 말한 것과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저는 음악이라는 예술 자체가 굉장히 위대한 일이라 생각하는데, 이 일이 위대한 일이라고 느끼지 못할 만큼 힘든 예술가들이 매우 많다는 사실에 연유합니다. 제가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은 그런 음악가, 예술가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카메레타 솔을 만든 것이기도 합니다. 단지 제자들만이 아니라 다른 음악가들에게도 중심축이 되는 어떤 하나의 공감대가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말한 인스퍼레이션(영감)이 조금 부족했던 점이 아쉽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제가 오스트리아 레히 페스티벌에 8, 9년 동안 참가했습니다. 그때 저와 학창 시절에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이 오케스트라를 같이 하고 갈라 콘서트 형식의 연주를 했습니다. 그중에는 빈 필하모니, 뮌헨 필, 바이리히 슈타트 오퍼, 잘츠부르크 등등 나름 일류 오케스트라에 있는 친구들이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리허설 시간이 끝나고 자기들끼리 모여 또 연습합니다. 저는 그게 사실 열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그러지 못하는 현실들이 조금 안타깝게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제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속해있는 환경에서 무엇인가에 하나의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음악을 하는 이유가 저의 삶을 윤택하기 위해서 하는 것도 있지만 사회적인 역할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응수는 최근 세상을 떠난 피아니스트 아내를 대신해 무대에 섰다. ⓒ김응수 제공


-연주자의 길을 어릴 때부터 계속해서 성장해 가는 데 있어, 그 길에 대해 후회, 의구심, 좌절 등등 한두 번의 경험을 하는데 어땠는지.

“사실 좌절은 연습할 때마다 매번 겪습니다. 연습하는 매 순간 가지게 되는 게 고뇌죠. 그렇지만 저에게는 늘 가지고 있던 두 가지의 생각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음악은 모든 예술 중에서 사실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하고 소리로 표현되는 것 중 사람을 제외하고 바이올린 소리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표현의 폭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으로 모태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교회 성가대에서 찬양하는 가장 큰 이유가 하나님이 찬양을 사실 제일 좋아하신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내가 하는 연주가 찬양이 될 수 있게끔 그래서 제가 하는 일에 굉장히 감사하고 제가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제 스스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어떤 눈으로 바라보든지 간에 저의 생각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음악을 계속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것에 대해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가 사람들과 같이 공감을 하느냐, 나만 공감하느냐의 차이라고 불 수 있겠지만 제가 스스로 음악을 할 수 있고 일련의 것들을 할 수 있다면 진짜 집도 없이 거리에서 잔다고 하더라도 행복하고 나 스스로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그런 좌절을 좌절로 생각지는 않습니다.”

-연주자들이 자신에게 맞는 악기와 활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악기에 대한 생각과 사용하고 싶은 악기가 있는지.

“저의 삶이 반영되는 질문이네요.(웃음) 사실 악기라는 것이 특히 오래된 악기들은 소견서나 보증서에 보면 ‘~인 것 같다. 이럴 거라 추측한다’ 이런 식으로 쓰여 있잖아요. ‘~은 누구의 악기다’라고 확정적으로 쓰는 것은 거의 없죠. 저에게 있어 중요했던 콩쿠르가 티보르 바르가 콩쿠르였는데 당시 사용한 악기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사용한 350만 원짜리 바이올린이었습니다. 뒤판은 공장에서 만들고 앞판은 사람이 만든 독일 악기죠.

그래서 악기에 대해 관심도 많았고 힘든 일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또 스트레스가 되어 안면 마비도 두 번 왔습니다. (얼굴에 손을 대며) 이 부분들이 그 당시의 흔적입니다. 당시에 악기를 제공받아 사용 중이었는데 두 번 다 악기를 돌려주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공교롭게 둘 다 베를린에서 연주를 마친 그다음 날, 그러니까 한 번은 ‘과다니니’, 또 한 번은 ‘젠나로 갈리아노’였습니다. 사용하다 돌려줘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봅니다. 지금 돌아보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악기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바이올린이란 악기에 대한 본질적인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악기의 소리를 잡아주시는 분들이 하는 말이 ‘연주자들이 찾아와 어떤 소리를 찾아주면 본인이 어떤 소리를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다’라고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한국이나 외국이나 같은데, 전 제가 원하는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좋은 악기를 사용할 기회가 있다 보니까, 결국 또 배우게 된 것 같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응수는 최근 세상을 떠난 피아니스트 아내를 대신해 무대에 섰다. ⓒ김응수 제공


지금 학교에서 있는 학생들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무거운 활을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 오른팔이 자연스럽게 움직여야 하는데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중 어떤 것이 편해”라고 질문을 합니다. 사실 저는 텐션도 제일 약하게 해 놓고, 가벼운 활을 사용합니다. 세고 강한 선과 탄성이 센 활 이런 거 안 좋아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약간의 움직임이 제한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 학생들에게 10만원짜리 그램 수를 정해 주고 그것을 많이 쓰게 합니다.

사실 악기가 굉장히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악기에 대해서 이해하고 어떤 식으로 악기를 사용하고 내가 표현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곡의 본질적인 이해나 표현 스스로 어떤 화학, 물리적 작용을 일으켜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인지를 배우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티보르 바르가 콩쿠르와 입시에서 좋은 악기를 빌려 사용한 줄 알고있습니다. 당시 사용한 활도 기념으로 가지고 있는데, 당시에 20만원정도 하는 활인데, 다들 깜짝 놀랍니다. 활의 탄성이 없어 튀기지 않습니다(웃음). 그래서 저는 악기랑 활에 대해서는 제가 원하는 음악을 표현하는데 있어 어떤 악기, 어떤 활을 사용하든지 간에 장애가 조금씩은 있겠지만 그것을 또 극복해 내는 것이 연주자의 능력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악기와 활로 연주하실 생각은.

“아쉽게도 몇 년 전에 악기를 팔았습니다. 요즘 수저를 따지는데 저는 무수저라(큰 웃음)”

-연주자로 살아가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선생님이나 연주자가 있다면.

“저는 우여곡절이 있는데 한국에선 스승님이 평태식 영남대 명예교수님 한 분만 있습니다. 제 유일한 스승이신데 음악가의 길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설득해 오늘날 제가 있게 됐습니다. 외국에도 몇 분 계시는데 가장 정신적으로 영향을 주신 분은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입니다. 이 분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이웃과 인터뷰한 내용이 나옵니다. ‘오이스트라흐와 바로 옆집에 살았는데 오이스트라흐는 잠을 자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다. 자기가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아침에 일어나면 연습하는 소리가 들렸다’라고 합니다. 저는 오이스트라흐가 그런 연주를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이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열정과 노력’, 저에게는 이 말이 가장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친한 친구 어머니가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와 절친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만나기도 했었는데, 친구 어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오이스트라흐 선생님 클래스로 들어가고 난 다음부터 연습하는 것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들었습니다. 크레머를 만났을 때 크레머가 말하길 70살이 되니 체력이 조금 저하돼 하루에 7시간밖에 연습 못 하는 것이 가장 아쉽다고 했습니다. 제 스승이신 보리스 쿠시니아 선생님도 크레머와의 일화를 말씀해 주셨어요. 누가 옥타브만 7시간을 연습해서 정말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는데 일주일을 계속하더랍니다. 소리에 민감해져 누군가 봤더니 크레머였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이스트라흐는 바이올린계의 전설이라 제게 영향을 준 면도 있고, 그분에게 배운 사람을 통해 다큐멘터리에서 한 말이 사실이라고 확인까지 했으니까요.”

바이올리니스트 김응수는 최근 세상을 떠난 피아니스트 아내를 대신해 무대에 섰다. ⓒ김응수 제공


-앞으로 계획은 무엇이 있나.

“연주를 계속 할 겁니다. 저의 계획은 단기적입니다. 제가 보통 연습하는 패턴이 곡 연습을 많이 하진 않습니다. 테크닉 연습을 사실 제가 좀 많이 하는 편입니다. 더블스톱 아니면 아르페지오, 아니면 에튀드를 했었는데 일단 올해 계획은 지금 제가 크로이처 연습곡을 6번째 하고 있는데 크로이처를 계속하는 겁니다.”

-한국에 계시면서 해외 연주 활동이 적어졌나.

“아니요. 계속하고는 있지만 코로나19로 조금 줄었고 그래도 다음달, 7월에 제 친구가 오스트리아에서 하는 페스티벌이 있어 그곳에서 연주를 해야 합니다. 독일도 가야하고요. 또 다른 미국 친구가 브라질에서 페스티벌을 하는데 그곳도 다녀와야 합니다. 시즌 중에는 10, 11, 12월 다 해외 연주를 다녀와야 합니다. 은근 스케줄이 바쁘네요. 유럽에 있는 동안에는 많이 연주하는 해는 거의 100회 정도씩 했었는데 아무래도 한국에서 지내다 보니 좀 줄기는 했죠. 그래도 계속 하려고 합니다. 계속해서 해외 연주를 하려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해외에서 연주를 하고 나면 그곳에서 저 나름대로 배우는 것도 있고, 어떤 것이 진짜 프로인지, 프로의 자세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아~ 맞다 이거지’라는 생각이 들 때 자극이 되어 좋습니다.”

-앞선 내용과 살짝 비슷하지만, 해외에서 연주 활동을 왕성히 하던 분들이 귀국해 어떤, 예로 들면 대학교 교수가 되든가 또는 어떤 안정적인 자리를 갖게 되면 그냥 그 삶에 안주하는 경우를 보게 되어 아쉽고 안타깝기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안주하기에는 사실 교수 월급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안주하려면 그래도 충분한 수입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하니 안주할 수도,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의 자리에 있는 것은 학생들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저를 지칭해서 교수님이라 부르지 못하게 합니다. 선생님이란 단어가 훨씬 좋은 말입니다. 제가 잘해서 어떻게 하다 보니까 저 자신을 그 자리에 가져다 놓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살아온 것도 아니고 바이올리니스트로 살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살아온 것이고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해야 하는 또 다른 하나의 역할인 것입니다. 지금의 자리는 감사한 명예직이라 생각하고 그에 맞는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제 선생님은 훗날 어떤 연주자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글쎄요 제가 많이 받는 질문인데 늘 어렵습니다. ‘연주를 정말 기막히게 잘하는 연주자였다’ 이런 것보다 정말 바이올린과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좋겠습니다. 제 콘체르토 레퍼토리가 60곡 정도인데 그중 약 40곡 정도는 대략 세 시간만 주면 바로 연주할 수 있습니다. 바스크스 협주곡도 사실 제가 조금 흥미롭기도 했지만 레퍼토리 확장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사실 아내가 그렇게 하늘나라로 간 것에 대해서 지금, 이 순간도 마음이 힘듭니다. ‘바이올린을 이렇게 해야 하나!’ ‘사람 인생이란 것 자체의 의미가 뭘까?’라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듭니다. 10년 사이에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아내까지 다 제 곁을 떠났습니다.

가족들이 그렇게 되다 보니까, ‘삶이라는 것 자체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바스크스 때는 사실 연습을 거의 못 했습니다. 제가 만족할 만한 뭔가에 그런 컨디션을 만들어서 연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테크닉보다는 진짜 중요한 것은 마음이지 않을까. 그래서 제 마음이 사람들에게 전해져 마음을 기억해 주는 연주자로 기억되는 것이 저는 제일 솔직한 답일 것 같습니다.

퀴리부인 이야기를 잠깐 하고 싶은데, 남편인 피에르 퀴리와 자신 마리 퀴리가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어요. 남편 피에르가 마차에 치여 사망하고, 노벨 화학상도 받았는데, 회고록에 보면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데 이 기쁨이 나에게 무슨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말이 너무 와 닿았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응수는 최근 세상을 떠난 피아니스트 아내를 대신해 무대에 섰다. ⓒ김응수 제공


-최근 두 번의 무대를 보았는데, 무대에서 여유로운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무대에 오르시나요.

“연주를 잘하려고 하는 생각은 안 합니다. 잘하려고 하면 오히려 잘 안되곤 합니다. 사람마다 당연히 다릅니다. 그런데 그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 함께 한 최혁재 지휘자와 친구 관계가 오랫동안 될 수 있는 것은 마음이 통하기 때문이죠. 서로 다르기 때문에 더욱 풍성해 질 수 있고, 무대에서는 어떤 상황이든 생길 수 있는데 그때 당황하지 않고 그 상황을 해결해야 하니까요. 지금까지 연주를 약 2300번 정도 했습니다. 그렇게 연주하면서 배운 것도 있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기본적으로 그냥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 그래서 ‘이 음악을 가져다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세 작곡가의 ‘사계’를 연주했는데 비발디 사계라는 것에 대해서 시선을 바꿀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어 좋았습니다. 그에 관련해서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요즘 독일에 있는 제 친구 중에도 정말 극단적으로 연주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비발디가 빈에서 사망했는데 신부님으로서 음악적 사명을 다하며 많은 것을 이루어 냈지만 마지막에는 음악가의 야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이 무지치’가 연주했던 좀 정석적인 것이 있기는 하지만 굉장히 자유롭게 표현해야 합니다. 그것은 연주자 본인이 어떻게 느끼는 영감에 따라 템포도 조금 익스트림하게 연주하기도 합니다. 막스 리히터도 연주해봤지만 제일 어려운 건 비발디입니다. 쉽게 연주하려면 제일 쉬울 수 있겠지요. 피아졸라의 곡은 좀 쉽게 느껴졌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했고 또 싫어했던 곡이 피아졸라였습니다. 리허설 시간의 80%는 비발디에 쏟았습니다. 풍경에 대한 영감을 악보에 표시해 놓았는데 그것을 근거로 템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카메레타 솔 구성은 주로 제자들 위주인가요.

“바이올린의 경우는 전부 제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른 파트는 학교와 제가 알고 있는 지인들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대학 4학년쯤 되면 대학입시가 제일 어려운 줄 알았는데 졸업 후에 내가 무엇을 하고 살지를 생각하면 입시가 별것이 아니었다고 다들 말합니다. 그들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기반이 되면 좋겠고 제가 물러날 때 다음에 그들이 잘해서 또 물려주고 이런 긍정적 순환이 되는 소사이어티가 되었으면 합니다. 페스티벌도 준비하고 있고 다양한 일을 하길 바랍니다. 사람들에게 강제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이 단체가 어떤 의미인지에 관해서 설명하고 동의하는 사람은 같이하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들도 의미가 있으니 열정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하고 고맙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뒤편에서 6월 30일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 공연에 꼭 와 달라고 했다. 원래 그 날 공연은 고인이 된 아내 채문영의 리사이틀이라고 한다. 대신 자기가 활을 잡았노라고 한다. 가슴 뭉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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