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서로 다른 스타일의 작품을 능숙하게 연주하는 카멜레온 같은 오케스트라가 되어야한다”는 모토를 내세운 ‘서울시향 음악감독’ 얍 판 츠베덴의 공식 데뷔무대는 강력했다. 베토벤 교향곡 7번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으로 서울시향의 잠재력을 끄집어냈다. 한 톨도 남기지 않고 긁어모아 밖으로 드러냈다.
주변 환경에 따라 몸 색깔을 그때그때 바꾸는 카멜레온처럼, 이질적 색책의 두곡을 한 무대에서 멋지게 펼쳐냈다. 나뭇잎 밑에서는 푸른 나뭇잎이 됐고, 나뭇가지 아래서는 갈색 나뭇가지가 됐다. ‘카멜레온 서울시향’의 첫 번째 변신은 엑설런트했다. ‘오케스트라 트레이너’의 실력은 파워풀했다.
얍 판 츠베덴은 20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서울시향 정기공연을 이끌었다. 지난 1월 부상당한 전임 음악감독 오스모 벤스케를 대신해 지휘봉을 잡으며 서울시향과 미리 만났다. 대타로 급하게 투입됐지만 이틀 연습 후 강렬한 지휘로 악단을 컨트롤해 관객을 사로잡았다. 4월에는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아주 특별한 콘서트’를 무보수로 지휘하기도 했다. ‘바이올린계의 우영우’ 공민배 군과의 협연이었다.
지난 두 차례 공연이 임시였다면 이번은 정식 데뷔다. 원래 내년 1월 1일부터 5년 임기가 시작되지만 6개월 빨리 음악감독 데뷔를 한 것. 서곡과 협연자 없이 교향곡 2곡으로만 프로그램을 짰다. 에너지음료든 비타민이든 두서너 개는 먹어야 소화할 수 있는 도전이었다.
판 츠베덴은 지난 4월 MBC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했다. 평소에도 팝음악을 즐겨 듣는 그는 부르노 마스의 ‘베르사체 온 더 플로어(Versace on the floor)’와 함께 베토벤 교향곡 7번의 2악장을 신청했다. “대중음악 프로그램에서 클래식 음악도 틀어줘 흥미로웠다”며 “음악이 인류의 보편적 언어라는 이야기는 클래식 음악에만 해당하는 표현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때 이미 계획이 들어 있었다. 베토벤 교향곡 7번으로 첫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지금까지 들었던 다른 지휘자와 다른 오케스트라의 연주와는 확연히 달랐다. 거침없는 활력과 불타오르는 열기, 때론 돌진하고 때론 곤두박질치는 광란의 흐름이 일반적이었는데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낯설었다. 딱 꼬집어 낼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1악장 포코 소스테누토(조금 끌 듯이)·비바체(아주 빠르게, 생기있게) 악장은 지금까지 들었던 음악과는 다르게 소프트했다. 풍성함은 가득했지만 밋밋한 느낌이다. 2악장은 초연 당시부터 각광받았다. 장송곡을 연상시키는 특유의 분위기와 그 안에서 감지되는 심오한 정서는 큰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 악장 역시 왈칵 가슴을 뜯기보다는 살짝 슬픔 한 자락을 내보이고는 자취를 감췄다. 3악장 스케르초와 4악장 피날레도 익숙함과 거리가 있었다.
성용원 평론가(작곡가)의 예리한 분석이 눈에 띈다. “누가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은 꼭 비장해야하고, 꼭 비통해야 한다고 했는가? 누가 그 악장을 장송곡같이 느리게 연주해야 한다고 했는가? 2악장의 템포 지시는 알레그레토(조금 빠르게)다. 판 츠베덴의 해석이 새롭고 신선한 게 아니라 도리어 자연 그대로의 베토벤에 다가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작곡가 본연에 다가가려는 시도와 접근이었던 것이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판 츠베덴이 걸은 셈이다.
차이콥스키는 모두 7개의 교향곡을 남겼다. 그 중 자주 연주되는 곡이 ‘비창’이라는 부제로 유명한 6번과 풍부한 선율미가 돋보이는 5번이다. 4번을 공연장에서 만날 기회는 많지 않다. ‘은밀한 후원자’ 나데즈마 폰 메크 부인에게 헌정됐다. 날 것 그대로의 차이콥스키에 포커싱을 맞춰 더 집중하며 감상했다.
포효(咆哮), 사나운 짐승의 울부짖음 딱 그랬다. 다양한 템포를 거치며 진행된 1악장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나타내는 금관의 위협적 팡파르로 시작됐다. 운명의 엄습은 사람들에게 불행과 절망을 가져다준다. 운명에 맞서 저항하고 투쟁하지만 역부족이다. 결국 현실을 외면하고 달콤한 꿈속에서 위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 차이콥스키는 폰 메크 부인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우리 인생은 괴로운 현실과 행복한 꿈의 교차에 지나지 않는다.” 차이콥스키는 광포와 몽환을 오가는 음률을 통해 그런 생각을 형상화했다. 트럼본의 찢어지는 듯한 사운드, 현을 타고 흐르는 오보에·클라리넷·플루트의 감칠맛, 활을 곧추 세워 연주하는 현악기군의 시각적 아름다움이 믹스됐다.
2악장은 오보에 솔로가 귀를 사로잡았다. “일상에 지친 사람이 밤중에 홀로 방안에 앉아 있을 때 그를 에워싸는 우울한 감정”을 나타낸다고 편지에 적었다. 현과 관의 케미가 빚어내는 소리는 아름다웠지만, 고뇌와 우수에 젖은 느릿한 흐름은 새로운 삶을 향한 용기마저 무참히 꺾어버린다. 그래서 애절하다.
3악장은 아기자기하고 흥미로운 스케르초 악장이다. 익살스럽기도 하다. 현악의 피치카토와 목관의 스타카토가 어우러져 빚어내는 리드미컬한 음률이 이색적이다. 차이콥스키는 “술에 취했을 때 어지러이 떠오르는 갖가지 공상”이라고 편지에 적었다.
잠시의 쉼도 없이 곧바로 4악장으로 이어졌다. 처음부터 심벌즈와 큰북이 깜짝 등장한다. 위태롭지만 일상으로의 복귀를 시도한다. 내부에서 찾을 수 없는 환희를 외부에서 조심스럽게 구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운명은 어딘가에 숨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중간에 떠들썩한 축제의 분위기가 잠시 잦아드는 틈을 타고 다시 운명의 팡파르가 울린다. 3명이 동시에 심벌즈를 울리는 장면도 이색적이다. 차이콥스키가 피날레에서 도달한 지점은 궁극적 승리라기보다는 일시적 도피에 가까웠다.
성용원 평론가는 “베토벤과 차이콥스키가 살아서 판 츠베덴의 연주를 들었다면 분명 만족했을 것이다”라며 “원전에 가까운 해석이었는데 이것이 새롭게 들리고 너무 적나라하게 민낯으로 보인다는 게 아이러니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류태형 평론가(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는 “착착 맞는 현, 관, 타악의 오와 열이 불을 뿜는 오케스트라에 전율을 느꼈다”라며 “판 츠베덴은 21세기의 토스카니니 같았다. 서울시향이 이런 저력을 가진 오케스트라였구나를 실감했다”고 밝혔다.
판 츠베덴이 연주하는 베토벤과 차이콥스키는 21일에도 롯데콘서트홀에서 똑같은 프로그램으로 한 번 더 열린다. 20일에는 앙코르를 들려주지 않았는데 둘쨋날 공연에선 들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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