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다리 휘청’ ‘기침 오케이’...음악은 냉철했지만 유머 넘쳤던 짐머만

깐깐한 관람수칙 내걸었지만 유쾌한 리사이틀
관객 굿매너에 완벽 피아니스트 엑설런트 연주

‘쇼팽 장송행진곡’ 시간 멈춘듯 아름다운 서정성
시마노프스키 변주곡은 통일감·스케일 돋보여

민은기 기자 승인 2024.01.08 09:05 | 최종 수정 2024.01.08 09:11 의견 0
크리스티안 짐머만 내한 리사이틀을 찾은 관객들이 롯데콘서트홀 무대에 있는 유럽에서 공수한 ‘스타인웨이 파브리니’ 피아노를 촬영하고 있다. ⓒ민은기 기자


#1. 유럽서 비행기 타고 온 스타인웨이 피아노 : 단연 크리스티안 짐머만(1956년생)의 피아노가 화제였다. 이번 여섯 번의 한국투어에서는 피아노를 직접 가지고와 공연하겠다고 미리 알렸다. 유럽에서 피아노를 공수했다. 한국에 도착한 피아노는 부산(12월 27일)과 대전(12월 29일) 공연에서 선을 보였고 3일 롯데콘서트홀에 등장했다.

무대 한가운데서 빛나고 있는 피아노는 ‘스타인웨이 파브리니’다. ‘스타인웨이 & 선즈’라는 브랜드 이름 아래 굵은 필기체의 ‘파브리니(Fabbrini)’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테크니션(기술자) 안젤로 파브리니는 연주자의 요청을 받아 수작업으로 피아노를 조율한 뒤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다. 일종의 커스터마이징(주문자 맞춤형) 버전으로, 자동차를 구입한 후 자신의 목적에 맞게 튜닝하는 것과 비슷하다.

크리스티안 짐머만은 롯데콘서트홀 내한 리사이틀에서 유럽에서 공수한 ‘스타인웨이 파브리니’ 피아노를 연주했다. ⓒ민은기 기자


짐머만은 원래 피아노를 통째로 운반해 다녔는데 2001년 9·11 테러 직후 미국에서 피아노가 압수돼 폐기처분된 이후 방식을 바꿨다. 키보드와 액션(키보드를 누르면 해머가 현을 때리게 하는 장치)을 따로 떼어 가지고 다니면서 피아노 본체에 설치해 연주했다. 지난 내한공연 때는 롯데콘서트홀이 보유하고 있는 피아노에 결합해 전국 순회 연주를 했지만, 이번에는 온전한 전체를 가져와 연주했다. 전속 조율사도 함께 왔다.

이 피아노는 지난해 가을부터 한국행을 예약하고 있었다. 9월에 진행됐던 독일 뉘른베르크 리사이틀에서는 무려 3대의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무대에 올라있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중앙에는 짐머만의 피아노가, 양쪽에는 파브리니의 손길이 닿은 피아노가 놓였다. 그날 프로그램이었던 쇼팽의 녹턴을 짐머만은 양옆에 놓인 피아노로 각각 한 번씩 연주했다. 녹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최적의 소리를 내는 피아노를 찾기 위한 수고였다. 그리고 한국 공연에 딱 맞는 명기를 미리 점찍어 이번에 가져온 것. “예술이 완성되는 마지막 작업은 공연장에서 일어납니다.” 건반 위 완벽주의자라는 별명은 헛말이 아니었다.

크리스티안 짐머만 내한 리사이틀이 열린 롯데콘서트홀 2층에 설치된 카메라를 가리개로 막거나 천으로 덮어 놓았다. ⓒ민은기 기자


#2. “마이크 떼라, 카메라 가려라” 이유 있는 깐깐한 요구 : 짐머만 공연에는 깐깐한 감상수칙이 있다. 안내문이 아니라 거의 경고문 수준이다. 1975년 18세의 나이로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세계적 거장이라는 타이틀을 얻기까지 좋은 음악을 들려주려는 고집이 반영된 결과다.

일단 모든 녹음·녹화·사진촬영이 엄격히 금지된다. 실제로 3일 롯데콘서트홀 무대 위에 매달려 있던 마이크를 사전에 모두 떼어냈다. 객석 2층에 있던 카메라도 가리개로 가리거마 천으로 덮었다.

커튼콜은 공연을 마친 연주자가 관객의 환호 갈채에 답하기 위해 무대로 다시 나와 인사하는 관례다. 이때는 대부분의 연주자가 촬영을 허락하는데 짐머만은 이도 허락하지 않았다.

크리스티안 짐머만 내한 리사이틀이 열린 롯데콘서트홀 무대에 매달려 있는 마이크를 모두 뗐다. ⓒ민은기 기자


이번 내한 리사이틀을 준비한 공연기획사 마스트미디어는 “휴대전화 전원이 꺼져 있는지 꼭 확인해 달라”고 따로 당부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알람과 진동도 울리지 않도록 조심해 달라고 재차 강조했다.

짐머만은 2022년 내한 당시 한 지방 공연에서 ‘객석에서 휴대폰 불빛을 봤다’고 불쾌감을 드러내며 2부 공연을 늦게 시작했다. 처음 한국을 방문한 2003년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의 무대 천장에 달린 비상용 고정 마이크를 보고 무단 녹음을 우려해 직접 선을 자르려고 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다.

‘건반 위의 완벽주의자’ 크리스티안 짐머만이 서울에서 세차례 리사이틀을 연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3. 쇼팽, 드뷔시, 시마노프스키, 그리고 라흐마니노프 : 공연의 막이 올랐다. 흰색 머리카락에 연미복을 입은 짐머만이 들어왔다. 지난 내한 때보다 걸음걸이가 더 활기찬 느낌이다. 살짝 체중조절도 한 것 같다. 달라진 것은 또 있었다. 이번엔 악보를 들고 등장하지 않았다. 무대 매니저가 시작 바로 직전에 악보를 피아노 위에 미리 올려놓았다.

‘쇼팽 스페셜리스트’ 별명에 걸맞게 1부는 피아노의 시인으로 채웠다. 프레데리크 쇼팽이 남긴 21곡의 녹턴 중 4곡을 잇달아 연주했다. 존 필드가 고안해 낸 음악 형식이었지만 화려하게 꽃피운 사람은 쇼팽이다.

첫 곡 녹턴 2번(Op.9-2)은 온화하고 따스했다. 야상곡의 대표선수다. 부드러운 장식음이 맴도는 선율과 3박자의 우아한 화성이 쉴 새 없이 귀를 애무했다. 연인과 왈츠를 추고 나온 어느 밤의 풍경이 오버랩됐다.

녹턴 5번(Op.15-2)은 더욱 깊은 정서를 파고 들면서도 한층 유연한 어법으로 밤의 음악을 풀어냈다, 16번(Op.15-2)은 예기치 못한 것을 드러내는 낯선 밤의 모습을 담아냈다. 그리고 18번(Op.62-2)에서는 단정함·묵직함·불안함 등 입체적 감정을 터치했다.

관객들의 굿매너도 최고의 공연에 힘을 보탰다. 감정이 끊어지지 않고 네 곡을 끝까지 연주하도록 중간 박수를 치지 않았다. 네 곡을 마친 뒤 쏟아진 박수도 연주자가 완전히 몸을 풀 때까지 마지막까지 기다렸다. 눈살 찌푸리게 하는 관크(관객+크리티컬)가 없었다. 짐머만의 센스도 재치 넘쳤다. 녹턴 2번과 5번 연주 사이에 관객 기침 소리가 동시에 들리자 ‘마음껏 하라’ ‘편하게 하라’는 손짓 사인을 보냈다.

쇼팽은 피아노 소나타를 세 곡만 남겼다. 쇼팽이 주로 다뤄왔던 한 편의 시 같은 짧은 곡들과 달리 소나타는 사이즈가 큰 규모였기 때문에 멀리 했던 것으로 보인다. 피아노 협주곡도 단 두 곡만 남겼다.

지난 공연에서 피아노 소나타 3번을 연주했고 이번엔 2번(Op.35)을 들려줬다. 짐머만의 손놀림은 앞서 연주한 녹턴과 비교해 더욱 화려함을 뽐냈다. 곧 불온한 일이 닥쳐올 것 같은 비극적인 짧은 서주에 이어 격정적인 긴박·긴장이 흘렀고(1악장), 변덕스럽게 들리기도 하고 초조하게 들리기도 하는 스케르초(2악장)를 거쳐 장송 행진곡(3악장)에 도착했다. 무거운 발걸음이 등장한 뒤, 좋은 시절을 회상하는 듯 아름다운 선율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다시 어둠에 휩싸인 거대한 발걸음이 가슴을 울렸다. 마지막 4악장 피날레는 떠나간 사람들에 대한 조용한 목소리들, 또는 떠나간 사람들의 마지막 움직임을 묘사했다.

짐머만은 냉철했다. 음악에서 풍기는 감정을 몸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꼿꼿하게 자세를 유지했고 오직 두 손으로만 음악을 이끌었다. 과장된 몸짓을 보이지 않았고 무색무취 감정을 끝까지 견지했다. “당신들이 느껴야 합니다”라며 듣는 사람에게 감정을 맡기는 모습이다. 다만 4악장을 마치며 살짝 큰 동작으로 악센트를 줬다.

2부에서는 클로드 드뷔시의 ‘판화(L.100)’를 연주했다. 1899년 파리 만국박람회는 드뷔시에게 충격이었다. 여기에서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음악을 들었고, 이 경험은 그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어렴풋한 인상만을 지니고 있었던 이국의 문물을 눈앞에서 목격한 후 조금 더 선명하게 낯선 나라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게 됐다.

‘판화’가 바로 그러한 예다. 미얀마의 금빛 탑을 묘사한 첫 곡 ‘탑’은 가벼웠다. 하바네라 리듬과 스페인 기타 음악에서 자주 발견되는 음형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두 번째 곡 ‘그라나다의 황혼’은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프랑스 전통 민요의 단편들이 쏟아지는 ‘비 오는 정원’은 선명했다. 짐머만의 손끝에서 ‘판화’는 고해상도 풍경화를 만들었다.

짐머만은 지난번 내한공연에서 폴란드 작곡가인 카롤 시마노프스키의 ‘9개의 프렐류드’ 중 1·2·7·8번을, 그리고 역시 시마노프스키의 ‘20개의 마주르카’ 가운데 13·14· 15·16번을 들려줬다. 그리고 이번 리사이틀에서는 마지막 곡으로 시마노프스키의 ‘폴란드 민요 테마에 의한 변주곡(Op.10)’을 연주했다. 이쯤 되면 짐머만의 시마노프스키 사랑은 진심이다. 우리에게 아직 낯선 작곡가의 매력을 알려주려고 애쓰고 있다.

‘폴란드 민요 테마에 의한 변주곡’은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다. 짐머만은 가늘고 섬세한 표현부터 굵고 웅장한 표현까지 완벽하게 선물했다. 공기를 타고 흐르는 모든 음표들이 공중에서 완전히 흩어져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감동이 이어졌다. 프로그램에 나와 있는 모든 곡을 끝마치자 브라보 환호가 물결쳤다. 짐머만은 온 힘으로 연주해 모든 힘이 소진됐다는 듯 ‘다리 휘청’ 퍼포먼스를 선보여 웃음을 안겨줬다. 위트 넘쳤다.

퇴장과 입장을 반복한 뒤 짐머만은 관객의 기립박수를 거부하지 못하고 앙코르 2곡을 선사했다. 지난 공연에서는 앙코르가 없었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 Op.23-4와 Op.32-1이다. 친절한 짐머만이다. 특히 마지막 앙코르는 객석에 불이 켜지고 관객들이 퇴장하는 도중에 다시 무대로 걸어 나와 연주해 환호를 받았다. 짐머만은 아주 천천히 슬로우 모션으로 피아노 뚜껑을 닫고는 악보를 챙겨 퇴장됐다.

류태형 평론가(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는 “쇼팽 소나타 2번 장송행진곡 악장이 압권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 아름다운 서정성이 빛났다”라고 말했고, 이어 “드뷔시 판화는 동양적인 색채감에 힘이 실렸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시마노프스키 변주곡은 한편의 유장한 대하드라마를 한 획의 큰 붓으로 쓰는 듯한 통일감과 스케일이 돋보였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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