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테너 이규철과 대금연주자 신재현이 무대 앞으로 나왔다. 두 사람 뒤에는 양재무가 지휘하는 보이스 오케스트라 ‘이마에스트리’가 든든하게 서있다. 왜적을 무찌르기 위해 맨 앞에서 돌진하는 두 척의 거북선을 백 척의 배들이 엄호하는 모습을 닮았다. 내년 이마에스트리 창단 20주년에 맞춰 세계 초연 예정인 양재무·정지원 작곡의 창작오페라 ‘이순신 1592’의 대표곡 ‘한산섬 달 밝은 밤에’가 흘렀다. ‘1592’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다.
“달빛 사이로 흐르는 비탄의 피리 소리는 왜 나를 깨우는가” 첫 소절부터 엄숙하고 비장했다. 대금 소리와 어우러진 솔리스트의 결연한 목소리는 가슴으로 훅 들어와 박혔다. 나라 걱정으로 잠들지 못하는 한 사나이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5년, 이순신은 남해안 진중에서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 같은 국가의 운명을 걱정하며 시조 한 수를 써내려갔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笳)는 나의 애를 끊나니” 이 유명한 시조가 노래가 되어 관객의 귀에 울렸다.
그리고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산산히 산산히 부서질지라도 자유를 위해 평화를 위해 헤쳐 나가 끝내 승리하리라”라는 대장부의 다짐이 이어졌다. 우국충정이 뭉클하다. 애국심 샘솟게 하는 마법의 노래다.
이마에스트리 창단 19주년 기념 정기연주회가 지난 5월 3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공연 타이틀은 ‘거북선을 만드는 남자들’. 2부에서 지난해부터 곡을 쓰기 시작한 ‘이순신 1592’의 하이라이트 곡들을 갈라 콘서트 형식으로 선보였다.
조이 심포니 오케스트라, 카로스타악기앙상블, 관악(호른 김효정·박지용/트럼펫 김슬기·알렉스 볼코프), 피아니스트 박성은이 이마에스트리와 호흡을 맞춰 풍성한 음악을 준비했다. 정한결과 박용빈이 편곡에 힘들 보탰다.
타악의 강렬한 울림과 함께 ‘서곡’이 스타트를 끊었다. 우리 전통민요 아리랑의 선율을 곳곳에 배치해 자연스럽게 들렸다. 곧 이어질 장렬한 스토리를 느끼게 해줬다.
공연의 해설을 맡은 이마에스트리 멤버 장일범은 “양재무 작곡가가 대본도 함께 쓰고 있는데, 생각만큼 빠르게 진척되지 않아 고민이라고 한다. 마침 장총찬을 탄생시킨 소설 ‘인간시장’을 쓴 김홍신 작가가 대본을 써주겠다고 약속했다. 혹시 마음 바뀔까봐 공식석상에서 제가 이렇게 도장을 찍는다”라고 재치 있게 말했다. 그러면서 “내년 4월 25일부터 27일까지 국립극장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놀라운 점은 여자가 한명도 나오지 않는 오페라다”라고 덧붙였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가 끝내고 ‘바다를 지배하라(조선 수군의 노래)’를 들려줬다. 묵직한 행진곡풍이다. “죽음을 넘어선 용사들이여/ 바다에 외친 승리의 함성/ 꽃처럼 피어날 평화 위하여/ 죽음을 넘어 정의의 날개 펴라/ 정의의 날개” 백전백승을 부르는 수군들의 늠름한 모습이 오버랩됐다.
비극적 선율이 가슴을 울리는 ‘앞산에 만발한 꽃들’은 도공 심수관의 노래다. 테너 민현기가 솔리스트로 노래했는데, 곡을 이해하려면 역사적 사실을 알아야한다. 임진왜란 뒤에 일어난 정유재란(1598년) 때 남원의 도공 심당길은 일본 규슈의 가고시마로 끌려갔다. 이후 심당길의 후손들은 한국 성을 고집하며 대대손손 가업으로 조선 도자기의 맥을 이었다.
이들이 만든 ‘사쓰마 도자기’(사쓰마는 가고시마의 옛 지명)는 1873년 12대 심수관 때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출품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가업을 빛낸 12대 심수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은 그 후 본명 대신에 ‘심수관’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계승해 사용하고 있다. 현재 15대 심수관까지 400년 넘게 조선 도공의 명가 ‘심수관 가문’을 이루고 있는 것.
신재현의 대금 소리를 타고 이번엔 ‘조선 노예들의 합창’이 흘렀다. “시냇가에 나무들/ 별을 헤던 언덕 희미한 초생달/ 그러나 지금 모든 것 빼앗기고 짓밟혀/ 산산히 찢겨져 끌려가네/ 이제...난 어디로 가야하나” 포로로 끌려가는 민초들의 슬픔과 아픔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개야 개야 짖지 마라. 밤 사람이 모두 도둑인가” 이 부분은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손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막사발에 적힌 시다. 머나먼 타향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심경을 도자기 표면에 써내려간 애달픈 마음이 읽혀져 숙연했다.
테너 이규철과 바리톤 한경석은 이순신과 류성룡으로 변신해 이중창 ‘신성한 불꽃’을 들려줬다. 국난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두 사람의 불꽃 마음이 가득했다.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나이다’는 테너 김지호가 솔리스트로 나왔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선조는 “해전이 불가능할 경우 육지에 올라 도원수 권율을 돕도록 하라”는 명을 내린다. 장군은 급히 장계(왕에게 보내는 문서)를 올린다.
피를 통하는 심정으로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전선수과(戰船雖寡) 미신불사즉(微臣不死則) 불감모아의(不敢侮我矣)’라고 적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전선의 수가 절대 부족하지만, 보잘 것 없는 신이 살아 있는 한 감히 적은 조선의 바다를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뜻이다. 나라를 생각하는 절절한 마음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이 글에서 힌트를 얻어 아리아를 만들었다.
“깊은밤 소리없는 침묵의 바다/ 해와 달도 빛을 잃고 어두운데/ 멀리서 들리는 전쟁의 북소리/ 칼에 베어 버려진 주검마다/ 하얀 옷에 피맺힌 통곡 있네/ 결연히 일어나라/ 일어나라/ 내가 죽어 길을 열리라/ 내가 죽어 길을 열리라/ 앞서 가니 나를 따르라/ 우리/ 우리/ 끝내 이기리라” 명량 앞바다의 거센 물결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한 사나이의 함성이 우렁찼다.
1부는 오페라 아리아, 교향곡, 한국 가요 등 다양한 곡을 묶어 두 개의 파트로 구성했다. 먼저 ‘내 인생 최고의 날’. 성악 위주의 콘서트에 악센트를 주기 위해 첼리스트 홍은선이 연주곡 2곡을 들려줬다. 안토닌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은 아주 빠른 프레이즈가 연속으로 이어지는 바이올린 곡이지만 특별히 첼로의 고난도 테크닉으로 폭풍우 몰아치는 분위기를 잘 표현했다. 홍은선은 또한 칼 젠키스의 ‘무장한 사람: 평화를 위한 미사’에 나오는 ‘축복(Benedictus)’도 연주했다.
두 명의 피가로가 나왔다. 바리톤 박정민과 석상근이다. 자코모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에 나오는 ‘나는 이 거리의 만물박사(Largo al factotum della città)’를 불렀다. 코믹한 동작과 대사로 관객을 쥐락펴락하며 유쾌한 시간을 선물했다.
테너 하세훈은 한스 메이 작곡의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Heut' ist Der Schönste Tag In Meinem Leben)’을 연주했다. 조셉 슈미트가 불러 히트한 곡으로 제목만큼이나 명랑하고 쾌활했다.
장민호 곡·김재곤 시의 ‘아름다운 코리아’는 바리톤·베이스 파트에 이어 자연스럽게 테너 파트로 넘어가며 대한민국을 예찬했고, 테너 김충식은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중 ‘아무도 잠들지 마라(Nessun dorma)’를 선사했다.
‘내 인생 최고의 날’에 이어 ‘환희의 송가 200년’이 이어졌다. 올해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이 초연된 지 2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남자 가수들만의 목소리로 합창교향곡 4악장 ‘환희의 송가(Ode to Joy)’를 불렀다. 합창교향곡에는 주요 음악적 전환점마다 남성의 목소리가 사용되도록 베토벤이 음악을 설계했다. 그런 특징을 부각시켜 베이스(안대현)와 테너(이병삼) 두 명의 남자 솔리스트가 등장하도록 재구성해 편곡했다.
앙코르는 모두 4곡을 선사했다. 바리톤 이명국이 ‘막걸리’를 솔로로 연주했고, 1부에서 독일어로 노래했던 한스 메이의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을 한국어로 한 번 더 불렀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Dona nobis pacem)’와 신상근 작곡의 ‘실로암’은 종교적 색채를 넘어 보편적인 노래로 승화했다.
앙코르 타임에는 이마에스트리의 시그니처 퍼포먼스 ‘반딧불 세리머니’가 등장했다. 모든 관객들이 휴대폰 플래시를 흔들며 콘서트장을 아름다운 불빛으로 물들였다. ‘역시 이마에스트리’라는 찬사가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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