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발레단이 스웨덴의 세계적인 안무가 요한 잉거의 대표작 ‘워킹 매드’와 ‘블리스’를 5월에 아시아 초연한다. 서울시발레단 단원들이 ‘블리스’를 연습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클래식비즈 김일환 기자] 세종문화회관 서울시발레단은 5월에 스웨덴의 세계적인 안무가 요한 잉거의 대표작 ‘워킹 매드(Walking Mad)’와 ‘블리스(Bliss)’를 아시아 초연한다.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최우수 안무상을 수상한 요한 잉거는 감성적이고 연극적인 안무 언어로 국제적 명성을 쌓아왔다. ‘워킹 매드’와 ‘블리스’는 클래식 발레의 어법에 기반을 두면서도 음악과 서사를 활용해 움직임을 확장하는 그의 안무 스타일이 두드러진다.
‘워킹 매드’는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를, ‘블리스’는 키스 재럿의 즉흥 피아노 연주곡 공연인 ‘쾰른 콘서트’를 중심 음악으로 사용한다. 두 작품이 전혀 다른 음악과 무대 언어를 바탕으로 하지만, 인간의 내면과 움직임의 진정성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요한 잉거의 미학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다.
반가운 얼굴도 합류한다. 영국 국립 발레단(ENB) 리드 수석인 이상은 무용수가 서울시발레단의 객원 수석으로서 이번 공연에 출연한다. ‘워킹 매드’에서 이상은의 활약을 감상할 수 있으며, 그가 국내에서 갈라가 아닌 작품 출연으로 무대에 서는 것은 15년 만이다. 특히 컨템퍼러리 발레 작품으로는 최초다.
서울시발레단이 스웨덴의 세계적인 안무가 요한 잉거의 대표작 ‘워킹 매드’와 ‘블리스’를 5월에 아시아 초연한다. 서울시발레단 단원들이 ‘블리스’를 연습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서울시발레단은 오는 5월 9일부터 18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워킹 매드’와 ‘블리스’를 더블빌(두 작품을 동시에 공연하는 것)로 선보인다고 16일 밝혔다.
서울시발레단운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공공 컨템퍼러리 발레단으로 올해 창단 2년차를 맞았다. 지난 3월 세종문화회관의 시즌 프로그램인 ‘2025 세종시즌’ 개막작으로 오하드 나하린의 ‘데카당스’를 무대에 올려 컨템퍼러리 발레의 매력을 입증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 여세를 이어받아 ‘워킹 매드’와 ‘블리스’로 또 한 번의 예술적 확장을 시도할 예정이다.
● 유럽 컨템퍼러리 무용계 두루 거친 안무가...NDT·쿨베리발레단 등서 활약
서울시발레단이 스웨덴의 세계적인 안무가 요한 잉거의 대표작 ‘워킹 매드’와 ‘블리스’를 5월에 아시아 초연한다. ⓒCARLOS QUEZADA/세종문화회관 제공
요한 잉거는 유럽 무용계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가진 안무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스웨덴 왕립 발레단 무용수로 커리어의 첫 발을 내디뎠다. 이후 현대무용의 중심지인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NDT)로 이적해 국제무대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지리 킬리안, 윌리엄 포사이드, 오하드 나하린 등 세계적인 안무가들과 함께 호흡하며 무용수이자 예술가로서 자신의 미학적 기반을 체화했고, 이후 독창적인 안무가로서 자신만의 길을 열어갔다.
요한 잉거는 1995년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2(NDT2)를 위한 첫 작품을 발표한 이후, 무용수이자 안무가로 활약하며 예술적 기반을 다졌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는 스웨덴의 대표적인 현대무용단인 쿨베리 발레단의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이후 프리랜서 안무가로 전환해 세계 유수의 무용단과 협업하며 자유로운 창작 활동에 몰입하고 있다.
그의 안무는 미니멀리즘과 직관적인 움직임, 스웨덴 특유의 섬세한 유머와 멜랑콜리가 어우러진 것이 특징이다. 무대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거나, 음악을 서사적으로 해석하는 드라마적 구성을 통해 인간 내면의 감정과 관계를 예리하게 탐구한다.
서울시발레단이 스웨덴의 세계적인 안무가 요한 잉거의 대표작 ‘워킹 매드’(사진)와 ‘블리스’를 5월에 아시아 초연한다. ⓒGregory Batardon/세종문화회관 제공
서울시발레단이 스웨덴의 세계적인 안무가 요한 잉거의 대표작 ‘워킹 매드’와 ‘블리스’(사진)를 5월에 아시아 초연한다. ⓒNadir Bonazzi/세종문화회관 제공
대표작인 ‘워킹 매드’(2001)는 모리스 라벨의 곡 ‘볼레로’와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을 결합했다. 인간의 광기와 고립, 긴장감, 관계 속 심리를 무대 위에서 시적이고도 극적으로 그려낸다. 반복적으로 고조되는 볼레로의 리듬과 무너지고 해체되는 벽 형태의 무대장치를 활용해, 복합적인 상황과 그 안에 놓인 인간관계를 표현했다.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하는 볼레로 리듬 안에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우울과 유머 같은 본질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워킹 매드’는 발표 이후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스페인 국립무용단, 캐나다 발레 BC, 독일 드레스덴 젬퍼오퍼 발레단 등 세계 주요 무용단의 레퍼토리로 공연되고 있으며, 현대 무용사에 길이 남을 ‘시그니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블리스’(2016)는 제목 그대로 ‘황홀함’ 혹은 ‘내면의 기쁨’을 표현한 작품이다. 피아니스트 키스 재럿의 즉흥 연주에서 영감을 받아 무용수들의 움직임과 음악과의 깊은 교감을 표현했다. 무용수들이 때로는 마치 음악을 연주하듯, 때로는 즉흥적으로 몰입하듯 움직이는 리듬 중심의 안무가 특징이다.
요한 잉거의 다양한 작품 중 음악 해석과 무용의 관계에 가장 집중한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음악 안에서 춤이 어떻게 숨 쉬는가’를 깊이 탐구하며, 무용수 개개인이 음악에 어떻게 반응하고 연결되는지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기존의 서사 중심 안무와는 달리 리듬, 충동, 반복, 즉흥이라는 네 가지 요소를 통해 ‘현재’라는 순간에 온전하게 몰입하는 순수한 움직임, 그리고 춤추는 그 자체의 기쁨과 황홀감을 그려냈다.
요한 잉거는 이외에도 ‘카르멘’ ‘페르귄트’ 등 내러티브 기반의 대작들을 선보이며 독자적 예술세계를 확장해가고 있다. 무용수로서, 지도자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창작자이자 탐구자로서 현대 무용의 지형을 넓혀가는 주인공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안무를 넘어, 인간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통찰을 던지는 하나의 시적 공간이며, 그 여정은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요한 잉거는 서울시발레단의 이번 공연을 통해 안무가로서는 처음 내한한다. 1990년대 NDT의 무용수로 내한한 경험과 그의 작품 ‘카르멘’이 2002년 스페인 국립무용단의 내한으로 공연된 적은 있지만, 안무가로서 내한해 한국의 관객들과 대면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공연에서 더블 빌로 소개하는 ‘워킹 매드’와 ‘블리스’ 두 작품 모두 아이코닉한 음악의 활용이 돋보이는 요한 잉거의 대표작으로, 관객에게 음악을 ‘보이게’, 움직임을 ‘들리게’ 하는 새로운 감각을 열어젖힐 것이다.
● 영국국립발레단 리드수석 이상은...서울시발레단 객원 수석으로 첫 출연
영국 국립 발레단(ENB) 리드 수석인 이상은 무용수가 서울시발레단의 객원 수석으로 ‘워킹 매드’에 출연한다. ⓒ 세종문화회관 제공
서울시발레단은 시즌 무용수 제도뿐 아니라 해외 유수의 발레단에서 간판으로 활동 중인 한국 무용수들의 국내 활동 거점을 마련한다. 지금까지 이들은 주로 클래식 발레 갈라 공연으로만 만날 수 있었다. 다양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국내 관객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현재 해외에서 공연하고 있는 컨템퍼러리 작품을 바탕으로 이들의 뛰어난 역량을 만끽할 수 있도록 객원 수석 무용수 제도를 도입했다.
25-26시즌에는 현재 빈 국립 발레단 수석 강효정과 영국 국립 발레단 리드수석 이상은, 네덜란드 국립 발레단 수석 최영규가 서울시발레단 객원 수석 무용수로 합류한다.그 중 이상은 무용수가 이번 ‘워킹 매드’ 공연을 통해 서울시발레단과 첫 호흡을 맞춘다. 갈라 공연이 아닌 작품으로 국내 무대에 오르는 건 15년 만이며, 컨템퍼러리 발레 작품으로는 이번 공연이 최초다.
이상은은 유니버설발레단에서 솔리스트로 활동한 후, 2010년 독일 드레스덴 젬퍼오퍼 발레단에 입단해 2016년 수석 무용수로 승급, 2023년에 현재 몸담고 있는 영국 국립 발레단의 리드 수석으로 합류했다. 클래식부터 컨템퍼러리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소화해온 그는 탁월한 신체 조건과 탄탄한 테크닉 등으로 주목받았고, 특히 컨템퍼러리 발레 작품에서의 특출한 표현력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상은은 2016년 드레스덴 젬퍼오퍼 발레단 소속 시절 ‘워킹 매드’에 출연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울시발레단 시즌 무용수들과 호흡을 맞추며 작품의 완성도를 제고하는 등 이번 공연에 활력을 더할 예정이다.
그는 “익숙한 클래식 작품에 비해 컨템퍼러리 발레는 음악이나 스토리 측면에서 다소 도전적일 수 있지만, 서울시발레단과 함께 하는 무대를 통해 관객들에게 새롭고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워킹 매드’는 무용수 간의 호흡이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서울시발레단의 객원 수석으로서 한국의 후배 무용수들, 그리고 관객들과 교감하며 감동을 전할 수 있게 되어 의미가 깊다”고 기대감을 전했다.
● 한스 판 마넨·오하드 나하린 이어 요한 잉거까지...세계로 점프하는 서울시발레단
서울시발레단이 스웨덴의 세계적인 안무가 요한 잉거의 대표작 ‘워킹 매드’와 ‘블리스’를 5월에 아시아 초연한다. 서울시발레단 단원들이 ‘블리스’를 연습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서울시발레단은 지난해 첫 라이선스 작품으로 선보인 한스 판 마넨의 ‘캄머발레’, 올해 시즌 첫 작품인 오하드 나하린의 ‘데카당스’에 이어 요한 잉거의 ‘워킹 매드’와 ‘블리스’를 연이어 국내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과감한 행보를 이어 나가고 있다.
2025 세종시즌 상반기에는 오하드 나하린, 요한 잉거 등 세계적 거장의 메소드 및 대표작 구현과 레퍼토리 확장에 집중했다면, 하반기에는 서울시발레단의 대표 작품을 재공연하고 ‘다시 보고 싶은 작품’으로 만드는 레퍼토리화 작업과 국내 안무가들의 새로운 창작 활동 지원에 힘을 실을 예정이다.
8월과 10월에는 지난해 서울시발레단의 공연에서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은 안무가 유회웅의 ‘노 모어’와 한스 판 마넨의 ‘캄머발레’를 재공연하며 이 작품들을 서울시발레단의 대표 레퍼토리로 거듭나도록 한다. 또한 한스 판 마넨의 새로운 라이선스 작품 ‘5 탱고스’와 현재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안무가 허용순의 ‘언더 더 트리스 보이스’를 더블 빌로 엮어 관객들에게 컨템퍼러리 발레의 다양한 매력을 선사한다.
세계적 안무가들의 우수한 작품이 포진한 서울시발레단의 레퍼토리는 신생 발레단으로는 이례적이다. 서울시발레단은 향후 국내외 안무가들과 신작을 개발하는 제작 플랫폼의 역할을 소화하며, 세계적 발레단과의 협력 및 교류를 통해 글로벌 무대에서 컨템퍼러리 발레의 거점으로 도약해 나갈 예정이다.
/kim67@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