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희 작가가 오는 12월 18일부터 내년 1월 5일까지 서울 인사동 제주갤러리에서 ‘이토록 희미하고 짙은’이라는 타이틀로 전시를 연다. 사진은 ‘활의 춤 2025 – 백만 번의 숨’. ⓒ제주갤러리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박진희 작가는 여성으로서 자연스럽게 ‘여성의 삶’에 시선을 두게 됐다. 그 관심은 자신의 어머니와의 대화와 제주 해안마을에서 만난 할머니들의 구술을 들으며 더욱 또렷해졌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각자의 삶을 살았지만 그들의 삶의 결이 놀라울 만큼 닮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지 못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었던 시대의 여성들. 강대국의 이권 다툼과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묵묵히 생명을 지켜낸 존재들. 오늘 우리가 딛고 선 삶의 토대는 그들의 노동과 희생 위에 놓여 있지만, 그렇게 위대한 삶은 늘 관심 밖에 머물러 있었다.
박 작가는 지난 8년 동안 제주 해안마을에서 함께 생활하며 할머니들의 생애를 기록하고, 그 기억을 ‘구리망’이라는 독특한 매체 위에 새겼다. 구리망은 본래 산업자재지만, 작가는 이를 삶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이며 마치 섬유를 다루듯 바느질해 나간다. 금사, 동실, 바닷물 같은 재료는 작업의 언어가 됐고, 바닷물로 그린 부분은 시간이 흐르며 푸른 녹으로 변한다.
박진희 작가가 오는 12월 18일부터 내년 1월 5일까지 서울 인사동 제주갤러리에서 ‘이토록 희미하고 짙은’이라는 타이틀로 전시를 연다. 사진은 ‘활의 춤 2024 ’. ⓒ제주갤러리 제공
박진희 작가가 오는 12월 18일부터 내년 1월 5일까지 서울 인사동 제주갤러리에서 ‘이토록 희미하고 짙은’이라는 타이틀로 전시를 연다. 2025 제주갤러리 공모 선정 아홉 번째 전시며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미술평론가 김종길은 이번 전시의 서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박진희의 작업은 쓰고 지우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과도 같은 기억이 물질을 뚫고 나와 스스로 형상을 입는 ‘생성’의 문제며, 그 생성이 만들어낸 공간적 현전의 문제다. 바닷물의 산화로 돋아나는 푸른 흔적은 낡은 찌꺼기가 아니라 시간의 소금기에 절여져 금속의 표피를 뚫고 돋아난 ‘살비늘’이다.”
작가가 구리망의 산화를 ‘기억이 천천히 드러나는 시간’으로 받아들이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침묵했던 여성들의 서사는 그렇게 금속 표면 위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사라짐과 드러남이 동시에 작동하는 특유의 시간성을 형성한다.
이러한 작업 세계는 이전 개인전 ‘이윽고 슬어드는’을 통해 처음 펼쳐졌고, 이번 전시 ‘이토록 희미하고 짙은’은 그 이야기의 ‘다음’에 해당한다. 앞선 전시가 과거의 삶을 기록했다면, 이번 전시는 그 이후의 시간—여전히 흐르고 있는 그들의 오늘과 내일—을 담아내며 더욱 깊어진 시선을 드러낸다.
작업을 이어가며 작가는 여성의 오래된 삶의 방식을 마주하게 된다. “여자는 시집오면서부터 윤달마다 수의를 짓는다”는 말, 그리고 그 수의에는 매듭을 짓지 않는다던 연화 어르신의 말 속에는 이승의 모든 인연과 무게를 풀어놓고 떠나라는 뜻을 품은 마음을 발견한다.
작가는 여성들의 지난한 돌봄과 노동,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지탱하는 힘을 읽어낸다. 해안마을 할머니들은 생을 뒤돌아보며 “행복”이 아닌 “편안”을 마지막 바람으로 말했고, 작가는 그 마음을 품어 구리망으로 ‘집 같은 옷’ 수의가 아닌 날개옷을 기워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마지막으로 몸을 눕힐 수 있는 상징적 공간, ‘원삼습의(圓衫襲衣)’는 전시의 중심에서 가장 사적인 위로와 죽음이 아닌 내세의 꿈을 새겼을 삶의 시간을 드러낸다.
박진희 작가가 오는 12월 18일부터 내년 1월 5일까지 서울 인사동 제주갤러리에서 ‘이토록 희미하고 짙은’이라는 타이틀로 전시를 연다. 사진은 ‘살의 노래’. ⓒ제주갤러리 제공
박진희 작가가 오는 12월 18일부터 내년 1월 5일까지 서울 인사동 제주갤러리에서 ‘이토록 희미하고 짙은’이라는 타이틀로 전시를 연다. 사진은 ‘베인 눈물의 서시’. ⓒ제주갤러리 제공
이번에 선보이는 몇 개의 작품을 미리 만나보자. ‘활의 춤 2025 – 백만 번의 숨’은 2024년에 이어 2025년까지 연결되는 작업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수의가 날개옷으로 전환되면서 2025년 ‘백만 번의 숨’에서는 100명의 목소리를 이어 삶과 죽음, 기억과 미래가 만나는 날개옷을 짓는다.
‘낯 꽃_어쩌면 모든 것에 피어’에서는 바닷물로 새긴 주름이 시간이 지날수록 녹청의 결로 드러난다. 더 깊은 층에서는 할머니들의 생애담이 손글씨로 적히며, 주름은 마치 손이 기록한 ‘초상화’가 된다.
‘베인 눈물의 서시’는 “그럭저럭 살아졌지” “4·3 이야기는 안하고 싶지. 지금도 떨려”와 같은 할머니들의 말을 바닷물로 써 부식시키고 오려내어, 미역 줄기처럼 매단 작품이다. 지워져 가는 말 위에 시간을 덧입히고, 다시 새로운 목소리로 되살린다.
‘당신의 시간’에서는 여러 장의 동망(銅網)이 중첩되며, 조명과 관람자의 시점에 따라 달리 보이는 인생의 결이 드러난다. 금사로 새긴 손과 발은 오랜 노동의 시간을 상징하며, 여성들의 노동이 곧 공동체의 심줄이었음을 새삼 확인하게 한다.
‘살의 노래’는 주름 골짜기가 산맥이나 물줄기를 닮은 화면 구조를 통해 한반도 현대사의 격랑, 그리고 그 속에서도 삶을 이어온 여성의 힘을 비유적으로 펼쳐내며 우리들의 삶의 심줄이었음을 상기시킨다.
김종길 평론가는 박진희의 작업이 전시장 공간과 맺는 관계를 ‘뒷경치’라 부르며, 조명이 드리운 그림자를 “망각된 역사와 잊힌 어머니들의 뒷모습이 비로소 형체를 갖추고 웅성거리는 장소”라고 설명한다. 이번 전시에서 벽면에 일렁이는 그림자는 바로 그러한 뒷경치, 우리가 오래도록 외면해 온 여성들의 삶을 다시 호출하는 장치가 된다.
박진희 작가가 오는 12월 18일부터 내년 1월 5일까지 서울 인사동 제주갤러리에서 ‘이토록 희미하고 짙은’이라는 타이틀로 전시를 연다. 사진은 ‘당신의 시간’. ⓒ제주갤러리 제공
동료들은 박진희 작가를 해안마을 할머니들의 ‘심방(무당)’에 비유한다. 기억을 대신 새기고 전하는 사람, 그 오래된 목소리를 오늘의 언어로 이어놓는 사람. ‘이토록 희미하고 짙은’은 애환을 호출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그들의 삶이 잊히지 않았음을 호명하는 위로의 자리”다.
작가가 그 시대의 여성들의 삶을 드러내는 이유는 그 길이 오늘의 여성들도 여전히 겹쳐 걷는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켜온 휴머니즘(보살핌, 노동, 인내)은 지금도 삶을 버티게 하는 가장 소중한 마음이라 확신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관람객이 참여하는 ‘바닷물 드로잉 워크숍’도 진행된다. 12월 27일 (토) 오후 1시에 열리는 이 프로그램에서 관람객들은 동망 조각에 제주 바닷물로 메시지를 새긴다. 작은 조각들이 모여 바람의 날개를 완성하게 된다. 이는 ‘누군가의 삶을 함께 기워 올리는 행위’라는 상징을 지니며, 그 결과물은 박 작가의 다음 개인전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프로그램 관련 문의는 제주갤러리로 하면 된다.
박진희 작가가 오는 12월 18일부터 내년 1월 5일까지 서울 인사동 제주갤러리에서 ‘이토록 희미하고 짙은’이라는 타이틀로 전시를 연다. 사진은 ‘비추고 이어지는 인드라망을 위한 리서치’. ⓒ제주갤러리 제공
‘이토록 희미하고 짙은’은 삶과 죽음, 애도와 염원이 만나는 경계의 형상이며 시간을 매개하는 존재론적 장치가 작동된다. 동망은 산업적 규격성과 기계적 반복의 물질성을 갖지만, 작가는 그 틈을 미세하게 흔들어 ‘되기(becoming)’의 구조로 전환한다. 고정된 사물로서의 수의가 아니라 새로운 주체가 되기 위해 다시 써 내려가는 일종의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를 만든다.
라틴어 팔림프세스트는 고대 양피지 등 기록매체가 귀하던 시절 기존에 쓰여 있던 글을 긁어내거나 씻어내는 행위 혹은 이 과정에서 이전 기록의 흔적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희미하게 남아 흔적의 중첩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 바닷물의 산화는 단순한 재료 변화가 아니라 기억들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변주되는지를 드러낸다. 이 작업은 우리 각자가 잃어버린 방향을 찾고자 드러내는 질문이 된다. 구리망의 산화가 만들어내는 미세한 이동을 통해, 사라짐과 드러남이 동시에 작동하는 팔림프세스트적 시간의 층위를 구축한다. 날개옷 표면의 푸른색 얼룩은 삶의 흔적이 희미해지는 동시에 다시 기록되는 복합적 시간의 증거가 된다.
“그 시대를 살아낸 여성을 위로하고, 보듬어, 특별한 존재로 인정하고 싶다”는 작가의 바람은 전시 전체를 관통하며,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가 그들에게 건네는 감사의 인사이기도 하다. 박 작가의 작업에는 어머니로부터, 그리고 그 이전 세대의 여성들로부터 이어져 온 희미하지만 짙게 남아 있는 이야기가 층층이 쌓여 있으며, 그 이야기는 구리망 위에서 찬란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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