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료 1500만원 전액 기부...고성현 ‘1500억 향한 마중물’ 부었다

40주년 콘서트 개런티 민간오케스트라에 전달
“음악인들이 먼저 서로 돕는 상생모델 만들어야”

민은기 기자 승인 2022.06.12 09:35 | 최종 수정 2022.06.12 09:37 의견 0
바리톤 고성현이 ‘데뷔 40주년 콘서트’ 출연료 1500만원을 전액 기부해 화제가 되고 있다. ⒸKSH클래식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자주 언급하지만 제가 경험한 가장 위대한 기부는 50년 전 오페라 연출가 프랭코 제피렐리의 기부입니다. 당시 라스칼라는 오페라 ‘라트라비아타’ 공연을 제피렐리에게 부탁했습니다. 제작비는 80억원이었고 제피렐리 개인의 개런티는 20억이었죠. 그런데 그 20억을 오페라 측에 기부해서 100억짜리 공연으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 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요? 100억짜리 오페라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코벤트가든은 120억에, 메트로폴리탄은 150억에, 그리고 일본은 200억에 ‘라트라비아타’를 사들였습니다. 사회의 시각으로서는 기부행위지만 경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문화마케팅이기도 하죠. 제가 하는 이 작은 기부는 제피렐리에 비하면 미약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문화예술이 활성화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아깝지 않습니다.”

바리톤 고성현이 ‘데뷔 40주년 콘서트’ 때 받은 출연료 1500만원 전액을 함께 공연한 아르텔필하모닉오케스트라에 기부한 사실이 12일 뒤늦게 알려지며 훈훈한 화제가 되고 있다.

‘현역 맏형’으로서 한국 클래식 음악 발전에 도움을 주고자 마중물을 부은 것이다. 1500만원이 1500억원으로 불어나는 눈덩이 효과의 시작을 알리는 흐뭇한 전달에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고성현은 지난 5월 20일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오페라 데뷔 40주년 기념콘서트’를 열었다. 1982년 서울대 음대 성악과 2학년 때 학교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서 알마비바 백작을 맡은 이후, 40년간 국내외 무대를 휩쓸며 최고의 성악가로 활약하고 있다.

바리톤 고성현(오른쪽)이 지난 5월 2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린 ‘오페라 데뷔 4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민은기 기자

그는 윤혁진이 지휘하는 아르텔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췄고, 후배 성악가들(테너 이정원·소프라노 박현주·소프라노 유성녀)도 무대에 올랐다.

많은 예술가들이 지난 2년 동안 코로나 때문에 노래하고 연주하고 춤추고 연기할 수 있는 공간을 잃어버렸다.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 없으니 당연히 수입이 끊어져 일상생활을 영위하기조차 힘겨웠다. 혹독한 시간이었다.

모두가 힘들다는 이유로 기업들조차 예술가들에게 후원의 손길을 멈췄을 때 누가 예술가들에게 도움을 줄 것인가 막막하기만 했다. 이런 가운데 고성현은 자신의 출연료 전액을 어렵게 운영하는 민간오케스트라에 기부한 것이다. 그는 “순수예술은 국가나 정부의 도움 없이는 생존 자체가 어렵다”라며 “제 바람은 이 작은 기부가 기업가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이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인도의 명상철학가 오쇼 라즈니쉬는 ‘사람을 스스로 걷게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뒤에서 억지로 밀어 넣거나 총을 겨누는 것이 아니라, 앞에 향기로운 꽃을 놓으면 된다’고 했다. 고성현은 “정부와 기업가들에게 예술을 지원해 달라 요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술가들이 먼저 서로를 도우면서 상생하는 자세가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이 같은 기부야말로 기업가들 앞에 향기로운 꽃을 내놓는 예술적 행위고, 고성현이 직접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바리톤 고성현(오른쪽)이 지난 5월 2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린 ‘오페라 데뷔 4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KSH클래식 제공


아르텔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윤혁진 이사장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부였다”며 놀랐다.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고 저녁이면 전국을 순회하며 밀린 연주회로 강행군을 펼쳐야 했던 고성현 교수(한양대)의 이번 40주년 기념음악회는 사실 굉장한 무리였다고 술회한다.

그는 “성악가들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독창회’라는 중압감은 정말 만만치 않다. 당시 허리도 성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팔리아치’ ‘리골레토’ ‘토스카’ 등 그 긴 호흡의 오페라 아리아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그 뜨거운 열정에 지휘자로서 감동도 했지만 그에 앞서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고 말했다.

지난 40년 동안 세계 곳곳을 누빈 엑설런트 성악가로서의 타이틀을 고려한다면 부족한 개런티인데 연주가 끝난 후 그마저도 예술단체에 전액 기부한 것을 두고 클래식 음악계에선 ‘역시 고성현!’이라며 엄지척이다.

정부와 기업의 후원을 바라기에 앞서 예술인들이 먼저 서로 기부하는 이 같은 움직임은 정부·기업 지원 모델인 ‘메세나 운동’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실질적 액션이라는 평가다.

음악계의 한 관계자는 “지난 40년 동안 ‘노래쟁이’로 살아온 바리톤 고성현의 기부는 진정 순수예술에 대한 기업과 정부의 관심에 물코를 트는 일임에 틀림없어 보인다”라며 “예술인들이 먼저 서로를 돕고 협력하는 이런 ‘윈윈 모델’이 앞으로 더 확산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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