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40년 응축한 단 7곡...“역시 고성현!” 저절로 찬사가 나왔다

오페라 데뷔 40주년 기념 콘서트 대성황
인생오페라·크로스오버곡으로 환상 무대

민은기 기자 승인 2022.05.24 16:26 | 최종 수정 2022.05.25 08:17 의견 0
바리톤 고성현(오른쪽)이 5월 2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린 ‘오페라 데뷔 4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민은기 기자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역시 고성현!”이라는 극찬이 저절로 나온 무대였다. 단 일곱 곡으로 지난 40년을 총정리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모든 것을 보여줬다. 인생 오페라 아리아 3곡과 한국가곡·크로스오버 등 대중성 있는 노래 4곡으로 꾸민 공연은 엑설런트였고 퍼펙트였다.

5월 2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바리톤 고성현은 새 단장을 끝마친 이 극장에서 지난해 8월 오페라 ‘나부코’로 무대에 섰고 이번엔 온전히 그만을 위한 ‘오페라 데뷔 40주년 기념 콘서트’를 열었다.

고성현은 1982년 서울대 음대 성악과 2학년 때 학교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서 알마비바 백작을 맡아 데뷔했다. 실력은 숨기려고 해도 숨겨지지 않는 법. 1983년 이름 석자가 방송을 타며 주목을 받았다. 세 번째 열린 ‘MBC대학가곡제’에서 ‘산아’라는 노래를 가지고 출전해 1등을 거머쥐었다.

“학교 연습실에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작곡과 학생들이었습니다. 신동수 선배도 늦은 시간까지 연습하곤 했는데, 어느날 옆방에 있는 나에게 ‘산아’ 악보를 건네며 대학가곡제에 나가자고 했습니다. ‘네 목소리가 바리톤이긴 하지만 높은 음이 가능하니 이 곡과 어울릴 것 같다’며 ‘너를 염두에 두고 썼다’고 립서비스도 덧붙였습니다. 상금을 받으면 라면 대신 삼겹살을 먹을 수 있다고 꾀기도 했죠. 어쨌든 1등을 해서 그 겨울에 삼겹살 많이 먹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고수들이 즐비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연습밖에 없었다. 남들을 능가하는 경쟁력을 가지려 목청 높여 노래했다. 타고난 성량에 프랙티스의 힘이 덧붙여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풍성한 보이스를 가지게 됐다.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뚫고 쭉쭉 뻗어 나가는 목소리 때문에 ‘대포’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바리톤 고성현(오른쪽)이 5월 2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린 ‘오페라 데뷔 4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KSH클래식

데뷔 40주년 콘서트는 ‘대포 고성현’의 진면목을 그대로 드러냈다. 객석 끝까지 또렷한 발성은 그대로 전달됐다. 1부에서는 가장 많이 공연했던 오페라 ‘팔리아치’ ‘리골레토’ ‘토스카’에 나오는 주요 아리아를 동료 성악가들(테너 이정원·소프라노 박현주·소프라노 유성녀)과 함께 들려줬다.

고성현은 먼저 광대로 변신해 ‘Si puo? Signore! Signori!(실례합니다, 신사숙녀 여러분)’로 강력한 한방을 날렸다.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에서 막이 오르기 전 토니오가 부르는 노래다. “이제부터 여러분이 보실 드라마는 우리 생활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생생한 감정에 관한 것이며, 우리가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곧 몰아닥칠 엄청난 비극을 미리 짐작하게 해주는 노래지만, 이날은 관객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 달려온 40년을 설명하는 의미를 담고 있어 더 뭉클했다. “자 이제부터 고성현의 40년이 펼쳐집니다”로 자동 번역됐다.

이 곡엔 기분 좋은 추억이 있다. 2002년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했을 때다. 고성현이 ‘Si puo?’를 끝마치자 무려 5분여 동안 브라보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세계적인 테너 호세 쿠라가 뒤를 이어 무대에 올라야 했지만 엄청난 환호성에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호세 쿠라의 밤을 훔친 동양의 바리톤’이라는 타이틀로 대서특필됐다. 스포트라이트가 온전히 고성현에 집중됐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화면에는 오페라 인생 40년을 정리한 영상이 흘렀다. 특히 고성현을 아꼈던 세계적 영화감독 겸 오페라 연출가 프랑코 제피넬리와 함께 찍은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목소리가 다비드의 근육처럼 탄탄하다. 그의 노래에 진정 감동했다. 내 무대에서 고성현 외에 다시는 동양인을 기용하지 않겠다”는 제피넬리의 평가는 그대로 적중했다. 당당하게 세계 톱클래스에 올랐다.

바리톤 고성현(오른쪽)이 5월 2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린 ‘오페라 데뷔 4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KSH클래식


곧이어 베르디 ‘리골레토’로 이어졌다. 이정원과 유성녀가 각각 ‘Questa o quella(이 여자도 저 여자도 내겐 똑같소)’와 ‘Gualtier Malde...Caro nome(괄티에르 말데...그리운 그 이름)’를 부른 뒤 고성현은 리골레토가 됐다. 정식 오페라 무대는 아니지만 극적인 효과를 위해 토니오 분장을 지우고 새로 리골레토 분장을 했다. 허투루 하지 않는 그의 섬세함과 완벽함은 이런 디테일에서도 빛을 발했다.

‘Povero Rigoletto!...Cortigiani, vil razza, dannata(가엾은 리골레토!...신하들아, 이 천벌을 받을 놈들)’에서 딸 질다를 납치당한 아버지의 비통함이 절절했다. 고성현이 가장 많이 맡은 배역이지만, 부를 때마다 새롭다. 오늘도 폭풍 절규에 실린 감동이 관객 가슴을 파고 들었다.

다음은 푸치니의 ‘토스카’. 이정원의 ‘E lucevan le stelle(별은 빛나건만)’와 박현주의 ‘Vissi d’arte vissi d’amore(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에 이어 합창과 어우러진 ‘Te Deum(테 데움)’이 흘렀다.

고성현은 1988년 나비부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그 부상으로 이듬해 푸치니 페스티벌에 참여해 28세에 처음 스카르피아 역을 맡았다. 40주년 콘서트에서는 한양대 제자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카리스마 넘치는 노래를 불러줌으로써 살아있는 현장학습도 겸했다.

2부에서는 고성현이 자주 부르는 우리 가곡과 크로스오버곡을 중심으로 대중성 있는레퍼토리를 구성했다. 후배 지원군인 유성녀는 ‘첫사랑’(김효근 시·곡)을, 박현주는 ‘수선화’(김동명 시·김동진 곡)를, 이정원은 이탈리아 가곡 ‘Core’ngato(무정한 마음)’을 불렀다.

모든 바리톤들의 최애곡인 ‘청산에 살리라’(김연준 시·곡)는 고성현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참가한 콩쿠르에서 우승을 안겨준 곡이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베이스 오현명에게 극찬을 받기도 했다. “길고 긴 세월동안 / 온갖 세상 변하였어도 / 청산은 의구하니 / 청산에 살으리라” 번잡한 속세를 벗어나 호젓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잘 표현해냈다.

바리톤 고성현(오른쪽)이 5월 2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린 ‘오페라 데뷔 4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민은기 기자


2014년께다. 국립오페라단의 ‘오텔로’ 공연을 앞두고 한창 연습하고 있는데 신영주 음악코치가 낯선 악보를 들고 나타났다. 그게 바로 ‘시간에 기대어’(최진 시·곡)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이런 풍의 노래를 권하지 않았기에 처음엔 심드렁했다. 그런데 가사를 읽어보니 ‘이건 내 이야기잖아’라며 백퍼 공감했다. 고성현은 “제 삶이 ‘오텔로’에 나오는 악인 ‘이아고’ 같은 삶은 아닐까 뒤돌아봤다”라며 “그동안 너무 무작정 달려왔던 삶을 돌아보는 계기도 됐다”고 고백했다.

“저 언덕 넘어 어딘가 / 그대가 살고 있을까 / 계절이 수놓은 시간이란 덤 위에 / 너와 난 나약한 사람 / 바람이 닿는 여기 어딘가 / 우리는 남아 있을까 / 연습이 없는 세월의 무게만큼 더 / 너와 난 외로운 사람 / 난 기억하오 난 추억하오 / 소원해져버린 우리의 관계도 / 사랑하오 변해버린 그대 모습 / 그리워하고 또 잊어야하는 / 그 시간에 기댄 우리”

스탠드에서 마이크를 아예 빼들었다. 사회를 맡은 유정현의 말대로 진정한 ‘마이크 잡스’의 신공을 발휘했다. 마이크를 멀리 대기도 하고 가깝게 대기도 하며 그의 시그니처 노래로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시간에 기대어’를 멋지게 불러줬다.

그리고 고성현을 상징하는 또다른 대표곡 ‘대지의 노래’(우광혁 시·곡)가 이어졌다. 가슴을 울렁이게 만드는 곡이다. 절친인 우광혁 교수가 오직 고성현 만을 염두에 두고 작곡했다고 한다. “계절은 말없이 변하고 /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르네 / 바람은 어디서 불어와 /지나온 이야기들을 들려주는가” 스케일이 큰 남성적 웅장미가 일품이다.

마지막 곡은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마이 웨이)’가 장식했다. 묵묵히 성악가의 길을 걸어온 한 사나이의 아름다운 독백이었다.

윤혁진이 지휘하는 아르텔필하노믹오케스트라는 콘서트 중간에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키나’ 간주곡과 ‘엔니오 모리코네의 영화음악 모음곡’을 연주했다. 모리코네 영화음악 모음곡에서는 박용힐이 오보에 솔로 협연했다.

고성현·이정원·박현주·유성녀의 앙코르 무대도 백미였다. ‘O Sole Mio(오 솔레 미오)’와 ‘Libiamo ne’lieti calici(축배의 노래)’ 두곡을 불렀는데, 특히 이정원이 ‘O Sole Mio’에서 “바리톤 성현아 너 참 잘 생겼다~데뷔 40주년 축하해~”로 재치 있게 노랫말을 바꿔 흐뭇함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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