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임윤찬 보러왔다가 말러에 빠졌다...‘얍 판 츠베덴의 서울시향’ 화려한 5년 출발

음악감독 취임연주회서 교향곡 1번 ‘거인’ 연주
4악장 호른·트럼펫 기립연주 황홀 사운드 선사

스무살 임윤찬 소년에서 성인으로 완숙한 선율
베토벤 ‘황제’ 자신만의 스타일 펼쳐 박수환호

민은기 기자 승인 2024.01.29 18:49 | 최종 수정 2024.02.05 08:36 의견 0

얍 판 츠베덴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이 2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을 연주하고 있다. 4악장에서 호른 연주자들의 기립 연주가 눈길을 끌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티켓은 예매를 오픈하자마자 1분도 안돼 전석 매진됐다. 엄청난 광클이다. 서울 시민 100명(1인당 2매)을 초대하는 추첨 티켓에도 1만6800여명이 몰리며 337대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치열한 ‘피케팅’에서 행운을 거머쥔 사람들이 합창석까지 꽉 채웠다. 이빨 빠지듯 자리를 채운 것이 아니라, 시루 속 콩나물처럼 빽빽하다. 빈 곳이 없다.

공연 시작 전 포토월 앞은 사진을 찍으려는 관객들로 북적거렸다. 프로그램북을 사려는 줄도 길게 늘어섰다. 방송국 카메라는 팬들의 멘트를 따느라 분주했다. 입장권을 구하지 못한 일부는 로비에 설치된 스크린을 통해 연주를 감상했다.

요즘 가장 핫한 임윤찬(2004년생)의 힘이다. 2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그는 ‘얍 판 츠베덴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타이틀로 열린 서울시향 음악감독 취임 연주회의 협연자로 나섰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올해 스무 살의 피아니스트 못지않게 얍 판 츠베덴(1960년생)과 서울시향의 파워도 솔드 아웃에 한몫했다.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카멜레온 오케스트라’를 만들겠다는 음악감독의 포부가 차근차근 이루어지고 있음을 입증했다. “임윤찬을 보러왔다가 얍 판 츠베덴의 서울시향에 반했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임윤찬이 2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얍 판 츠베덴이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임윤찬이 서울시향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한 뒤 지휘자 얍 판 츠베덴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임윤찬이 2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얍 판 츠베덴이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임윤찬이 나오자 ‘와~’ 환호성이 대단하다. 연미복에 하얀 나비 넥타이를 맸다. 더벅머리에서 벗어나 깔끔한 헤어 스타일로 변신했다. 2019년 윤이상 국제 음악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했고, 2022년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역시 역대 최연소로 우승했다. 선곡한 곡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2022년 홍석원이 지휘하는 광주시립교향악단과 ‘황제’ 공연 실황을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로 발매하기도 했다.

연주 시작 전 판 츠베덴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마에스트로! 잘 부탁드려요”라는 존경심의 표현이다. 1악장부터 3악장까지 두 사람은 눈빛을 교환하며 깊은 교감을 나눴다. 음악 앞에서 44세의 나이 차는 장벽이 아니었다. 선배는 후배에게 배우고, 후배는 선배에게 배우는 굿 파트너였다.

1악장 오케스트라 도입부를 지나 피아노가 분수처럼 분산화음과 트릴을 뿜어냈다. 그런 다음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는 힘을 합쳐 의욕적인 구상과 힘찬 표현을 펼쳤다. 베토벤이 창조한 긴장감 넘치는 불협화음이 하나씩 가슴으로 들어와 박혔다.

한음 한음 진중한 터치로 시작한 임윤찬 특유의 강약 조절은 아름다운 선율을 공중에 흩뿌렸다. 오른손으로 연주하는 동안 왼손은 곡의 흐름에 맞춰 춤추듯 공중에서 원을 그렸다. 때때로 차분하게 오케스트라를 바라보며 곡의 호흡을 고르던 그는 끊임없는 다채로움을 뽐내며 신선함을 선사했다.

임윤찬이 2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얍 판 츠베덴이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임윤찬과 얍 판 츠베덴이 2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한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임윤찬과 얍 판 츠베덴이 2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한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녹턴풍의 느린 2악장은 숭고한 코랄 위에서 펼쳐지는 러브송이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는 번갈아 서로를 반주하며 두 개의 변주를 전개했다. 이 악장은 영화 ‘불멸의 연인’의 메인 테마로 쓰이기도 했다. 관객 모두는 임윤찬이 건반을 누를 때마다 자신의 불멸의 연인을 찾아 함께 떠났다.

3악장 론도의 질주가 시작됐다. 소년에서 성인으로 점프한 완숙한 선율이다. 자기만의 색깔이 뚜렷하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조용한 아다지오가 다시 등장하지만 곧 힘찬 피아노와 팀파니가 어우러지며 마무리 된다. 건반에서 손을 떼자 브라보 소리가 천장을 찔렀다.

임윤찬은 객석의 호응에 앙코르 곡으로 ‘정결한 여신’을 들려줬다. 빈첸조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에 나오는 노래로, 프레데릭 쇼팽이 피아노 버전으로 편곡한 곡이다. 비록 가사는 없었지만 성악가의 음성이 들리듯 임윤찬의 손가락을 타고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오버랩됐다.

얍 판 츠베덴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이 2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얍 판 츠베덴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이 2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얍 판 츠베덴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이 2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2부는 서울시향 제3대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판 츠베덴의 시간이다. 그는 앞으로 5년 동안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전곡 녹음에 도전하겠다고 밝혔다. 말러는 생전 9개(번호가 붙지 않은 ‘대지의 노래’ 포함)의 교향곡을 썼다. 1악장만 쓴미완성 작품을 포함하면 총 10개의 교향곡을 남겼다.

1번 ‘거인’. 젊은 말러가 청춘의 모든 희망과 절망을 담아낸 자기 고백의 심포니다. 첫 구상에서 최종 수정까지 대략 15년이 걸렸다. 판 츠베덴이 로열 콘세트르헤바우와 뉴욕 필하모닉과의 첫 공연에서도 선택했던 ‘신성한 곡’이다.

말러는 1악장을 ‘음악이 아닌 자연의 음향’이라고 불렀다. 말러의 정의를 입증하듯 여기저기서 신비로운 ‘소리’를 쏟아냈다. 3명의 트럼펫 연주자는 무대 오른쪽 출입문 안쪽에서 희미한 팡파르를 울렸다. 어둠을 뚫고 오는 새벽의 소리다. 뻐꾸기 소리를 닮은 클라리넷은 다양한 음형을 풀어 놓았다.

그 소리들은 안개 속에서 피어올라 합쳐지고 흩어지며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존재론적 의미로까지 확장됐다. 강렬한 팀파니 사운드와 함께 갑자기 끝나는 종결은 임팩트가 컸다.

2악장 스케르초는 브루크너풍의 렌들러(오스트리아와 독일 남부 지방에서 유행한 춤곡)다. 각 악기 군이 차례대로 한 묶음으로 움직이는 집합연주를 보여줘 시각적 효과도 볼만했다. 우아한 군무였다. 부드러운 선율이 흐른 뒤, 다시 각 악기 그룹이 순번을 정해 웅장한 소리를 울렸다. 첫 악장과 마찬가지로 임팩트 있는 클로징이 되풀이 됐다.

팀파니와 더블베이스의 듀오로 3악장이 시작됐다. 바순, 첼로, 팀파니, 플루트 등이 하나씩 가세하며 음을 차곡차곡 쌓아 나갔다. 엄밀한 수학적 규칙성이 지배하는 듯한 사운드다. 느린 부분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말러가 자신의 가곡 ‘내 연인의 푸른 눈동자’(‘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중 제4곡)을 인용한 대목이다. 앞의 두 악장과는 다르게 들릴 듯 말 듯 두 번의 조용한 울림으로 끝났다.

3악장에서 4악장은 잠시의 쉼도 없는 아타카(attacca)로 이어졌다. 말러는 한때 마지막 악장에 ‘지옥에서 천국’이라는 표제를 붙였는데, 단테의 ‘신곡’을 염두에 둔 타이틀이다. 3악장에서 켜켜이 쌓은 온갖 소리들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강한 충격과 강렬한 불협화음으로 만들어진 아우성이다. 이 심연의 절망이 아름다운 선율을 거쳐 장대한 코랄풍 선율로 마무리됐다. 베토벤 스타일의 ‘영웅적인 투쟁을 거친 승리’지만, 말러는 그 승리가 공허하다는 암시도 잊지 않았다.

영웅적인 승리를 연주하는 호른은 4악장의 상징이다. 심지어 연주자 8명이 모두 함께 일어나 연주했다. 옆자리에 있던 5번 트럼펫 연주자도 동참해 스탠드업 자세로 소리를 쏟아냈다. 흔치 않은 장면이다. 기립 연주는 폭풍 같은 음량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시각적으로도 극적 연출을 보여줬다. 이처럼 오케스트라 단원이 대열을 벗어나 출입문·합창석 등에서 따로 연주하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잘 보이도록 연주하는 것을 ‘반다(banda)’라고 한다. 말러는 악보에 ‘반다’ 표시를 해놓았다.

그런데 프로그램북에는 분명 호른 연주자가 7명이라고 적혀있는데 8명이다. 궁금했다. 서울시향은 “호른 수석, 즉 퍼스트(first)가 연주해야 하는 중요한 부분이나 솔로 파트가 많아서 역할이 가중되는 경우 어시스트를 붙여서 서포트하기도 한다”라며 “말러 1번은 워낙 대편성인데다 섬세한 연주도 요구되기 때문에 어시스트를 1명 추가해 8명이 연주했다”고 설명했다. 의문이 한방에 풀렸다.

얍 판 츠베덴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이 2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얍 판 츠베덴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이 2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을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류태형 음악평론가(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는 “임윤찬의 연주는 볼 때마다 흥미롭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이 이끌어 간다. ‘황제’도 마찬가지다. 그 과감함을 지탱하는 반석은 숱한 연습과 실험으로 가능했다. 언제 어떤 곡을 연주해도 그 해석은 새로울 것 같다. 대단한 연주자다”라고 치켜세웠다.

이어 ‘거인’에 대해서는 “말러 음반 사이클을 시작하는 교향곡 1번은 충실한 연주였다. 정신 번쩍 나는 대음량의 총주와 여리게 조절하는 악구 사이에 다이내믹 레인지가 굉장했다”라며 “느물느물하고 쿰쿰한 말러 음악의 통속성이 너무 세련되게 다듬어졌다는 점은 아쉬웠지만 그것도 해석의 한 방향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류 평론가는 ‘황제’와 ‘거인’에는 ‘정확한 거는 아름답다’는 공통점이 있었다고 짚었다. “판 츠베덴과 서울시향은 뭉개지거나 숨기지 않고 음표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신비감을 줄인 대신 파악 가능한 부피와 바디감을 가지고 작곡가의 세계를 보다 뚜렷하게 전달하는 데 일조했다”며 “흠모하던 그림을 실제로 보러 미술관에 가는 것처럼 고해상도의 음악을 피부로 느끼는 게 음악회의 묘미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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