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원작에서 ‘퍽’이 사랑을 엇갈리게 만드는 장난꾸러기 어린이 같은 캐릭터였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오랜 세월 사랑의 우여곡절을 지나온 현자와 같은 존재로 나옵니다. 사랑과 상상을 열어주는 메신저 역할이죠.”
서울시발레단이 창단 공연으로 준비한 ‘한여름 밤의 꿈’(8월 23일~25일 세종문회회관 대극장)의 안무와 총연출을 맡은 주재만은 요정 ‘퍽’의 역할을 이렇게 정의했다. 서울시발레단은 국내 최초 공공 컨템퍼러리 발레단이다. 컨템퍼러리(contemporary) 발레란 ‘고전 발레’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현대 발레’를 의미한다.
22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주재만 안무가는 “퍽은 안무가의 다양한 상상을 연결해 주는 문이자, 관객들이 자신을 투영해서 볼 수 있는 거울 같은 존재다”라며 “퍽의 시선으로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 낼 것이다”라고 밝혔다.
셰익스피어의 낭만 희극으로 잘 알려진 ‘한여름 밤의 꿈’은 조지 발란신, 프레드릭 애쉬튼 등 세계적인 안무가들에 의해 재창조되고 클래식, 음악,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작품이다.
뉴욕 컴플렉션즈 컨템퍼러리 발레단 전임 안무가인 주재만은 30년 동안 미국에서 주로 활동하며 도전적·혁신적 작품을 선보여 왔다. 국내에서도 와이즈발레단, 광주시립발레단과의 작업으로 주목 받았다. 그는 “한국의 젊은 무용수들에게 내가 아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가르쳐주고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며 후배사랑의 마음을 드러냈다.
주 안무가는 “창단 작품으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규모의 신작을 세계 초연하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밤이 지나면 아침이 찾아오는 것처럼, 새롭게 창단하는 서울시발레단이 이번 공연 이후 맞이할 새로운 날, 희망찬 미래를 담고 싶었다”며 ‘한여름 밤의 꿈’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공연은 총 2막 7장으로 구성된다. 고전 발레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동작부터 현대무용의 요소와 인간의 내밀한 감정을 표현한 농밀한 움직임까지, 주 안무가 특유의 ‘깊은 상상력과 상징적이고 환상적인 안무가 관객들이 객석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만큼 아름다운 무대’를 선사한다.
1막이 사랑의 순수성과 아름다움, 처절함과 아픔을 대형 군무 중심으로 보여준다면, 2막은 개별적 인물과 관계에 더 집중한다. 순수한 사랑을 나누는 연인, 상실한 사랑으로 슬픔에 빠진 사람, 삼각관계에 놓인 이들 등 각기 다른 사랑의 모습이 2인무, 3인무 등으로 펼쳐지며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7m 높이의 대형 세트,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마법 같은 영상, 독창적인 디자인의 의상 등 다채로운 볼거리도 기대되는 부분이다. 이번 공연을 위해 150여 벌의 의상이 제작된다. 의상 디자인을 맡은 크리스틴 다치는 세계적인 안무가들과 협업하며 200편이 넘는 발레 작품의 의상을 디자인 해온 컨템퍼러리 발레 전문 의상 디자이너이다.
튜튜, 레오타드와 같은 기본 발레 의상은 물론이고, 헤어피스를 활용한 특수 펠트 드레스 등 기존 발레공연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독창적 디자인의 의상을 선보이면서 관객들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할 예정이다.
음악은 로베르트 슈만의 가곡과 피아노곡이 중심이 된다. 각 장면과 안무의 흐름을 고려해 면밀하게 선곡 중이다. 주 안무가는 슈만을 초이스한 이유에 대해 “슈만도 사랑 때문에 괴로워했고 정신병에 걸린 외로웠던 사람이었다”며 “로맨틱 감정과 사랑에 얽혀서 살아갔던 히스토리가 제게 와닿았다”고 말했다. 이어 “음악 선정을 위해 1000곡 가까이 들으면서 지금도 100% 정하지 않았고 조금 더 좋은 음악을 선택하기 위해 집에 서도 음악을 고른다”고 설명했다.
이와 더불어 미국에서 활동하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필립 다니엘이 이번 작품을 위해 2곡을 새롭게 작곡해 무대에서 직접 라이브 연주로 선보인다. 아름답고 서정적이며 때로는 격정적인 음악은 판타지 가득한 무대와 어우러져 ‘한여름 밤의 꿈’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한여름 밤의 꿈’에는 지난 1월 첫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24시즌 무용수와 프로젝트 무용수, 해외 발레단에서 활동 중인 해외 객원 무용수, 작품의 성격을 고려한 캐스팅콜 등을 통해 선발된 32명의 무용수가 출연한다. 이들은 지난 5월 27일부터 13주 동안 주 6일의 강도 높은 연습을 소화하며 창단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주역인 ‘퍽’은 프로젝트 무용수인 대만의 리앙 시후아이와 슬로바키아국립발레단 종신 솔리스트인 이승용이 더블 캐스팅됐다. 주 안무가는 “두 사람은 내면의 감정 표현이 좋고, 기량이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또한 원진호, 이지희, 김민경, 김여진, 김희현, 이근희, 이정우 등 10인이 주역으로 캐스팅돼 솔로(1인무), 파드되(2인무), 파드트로와(3인무) 등 다채로운 구성으로 사랑의 다양한 형태와 감정들을 선보인다.
이승용은 이번 공연으로 8년 만에 한국 관객을 만난다. 국립발레단을 거쳐 2017년 슬로바키아국립발레단에 입단한 그는 “해외에서 활동했던 레퍼토리와 전혀 다른 경험을 하고 있어 굉장히 흥분된 상태로 연습에 임하고 있다”며 “한국의 좋은 무용수들과 합을 맞추고, 같이 땀 흘리며 공연을 준비하는 것이 해외 생활에서 그리운 것 중의 하나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주재만 안무가와 작업하며 예술적 성장은 물론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감정에 대해 많이 배우고 있다”고 덧붙였다.
리앙 시후아이는 한국에서 17년째 활동하고 있다. 그는 유니버설발레단 솔리스트에서 컨템퍼러리 발레 공연에 대한 갈망으로 프리랜서 무용수로 전향해 활동하던 중 서울시발레단 오디션에 응시했다.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어려움도 있지만 무용수로서 ‘내가 다른 사람의 꿈에 살고 있음’을 생각하면 힘이 난다”고 말했다.
24시즌 무용수인 원진호는 “세종 대극장이라는 큰 무대에서 컨템퍼러리 발레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5월부터 준비하며 기대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며 빨리 관객들을 만나고 싶다며 웃었다.
세종문화회관 안호상 사장은 “창단 공연 ‘한여름 밤의 꿈’을 시작으로 클래식 발레가 줄 수 없는 새로운 에너지를 가진 컨템퍼러리 발레의 매력을 관객들이 알 수 있도록 하겠다”라며 “과감한 시도와 완성도 높은 작품 제작으로 안무가, 무용수, 관객과 함께 한국 컨템퍼러리 발레의 새로운 길을 일구고 만들어가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 서울시발레단 24-26시즌 무용수 20명 선발 예정
<백브리핑> 서울시발레단은 창단 공연 후 공개오디션을 개최해 24-26시즌 무용수를 선발하고 본격적인 레퍼토리 개발과 작품 제작에 돌입한다. 24-26시즌 무용수는 9월부터 2년여 동안 한스 판 마넨 안무 ‘캄머발레’(10월 9일~12일 M씨어터)를 시작으로 2025년 오하드 나하린, 요한 잉거, 허용순, 유회웅 등 서울시발레단이 24-26시즌에 선보이는 국내외 주요 안무가 작품에 참여하게 된다. 선발 규모는 20명 내외.
기존 공공발레단의 정년보장 단원제와 달리 시즌단위 계약을 기본으로 하는 시즌무용수 시스템을 도입한 서울시발레단은 지난 1월 오디션을 통해 2024시즌 무용수 5명을 선발한 바 있다. 서울시발레단은 창단 공연과 더불어 본격 운영을 시작하면서 24-26시즌 무용수의 선발·운영을 통해 안정적 작품 제작과 레퍼토리 개발이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재정비했다.
안무가마다 스타일과 개성이 뚜렷한 컨템퍼러리 발레는 무용수들이 소화해야하는 작품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반면 클래식 발레 위주의 우리나라에서는 무용수들의 컨템퍼러리 발레 경험이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편이다.
이 때문에 서울시발레단은 국내외 주요 안무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통해 무용수들의 경험과 역량을 축적해나가면서 차별화된 서울시발레단의 레퍼토리를 구축해나갈 계획이다. 시즌무용수들은 공연 이외에도 역량 강화를 위한 다양한 워크숍과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다.
시즌무용수를 중심으로 작품 규모와 특성에 따라 해외 객원 무용수와 프로젝트 무용수도 추가로 공연에 결합한다. 서울시발레단은 해외 주요 발레단에서 활약하며 안무가들과 신뢰를 쌓은 무용수들의 경우 작품 출연뿐 아니라 한국 초연 후 해당 레퍼토리의 재공연 시 리허설 디렉터로까지 역할을 확장하는 시도를 통해 한국 컨템퍼러리 발레의 성장을 도모할 계획이다.
해외 라이선스 작품 공연 시 안무가가 지정한 스테이저가 방한하는 대신 한국 무용수가 스테이저로 리허설을 진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첫 시작으로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 활약한 김지영이 안무가 한스 판 마넨의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오는 10월 ‘캄머발레’ 한국 초연 이후 재공연부터는 스테이저로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서울시발레단은 현재 공개한 안무가 외에도 국내외 주요 안무가들과 중장기 작업에 대한 논의를 진행 중으로, 2025년 안무가 및 작품은 2025 세종시즌 프로그램과 함께 최종 공개한다.
서울시발레단 24-26시즌 무용수 오디션은 기본기를 확인하는 1차 오디션 후 2025년 작품 안무가(또는 스테이저)가 심사하는 2차 오디션으로 진행하며, 창단 공연 ‘한여름 밤의 꿈’ 출연 무용수들은 1차 오디션이 면제된다. 2차 오디션은 안무가들의 여건에 따라 실연과 영상 오디션을 병행한다.
18세 이상 발레 무용수라면 지원 가능하며, 8월 12일(월)까지 접수한다. 오디션 관련 자세한 사항은 세종문화회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서울시발레단은 단장과 예술감독 없이 운영되고 있다.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22일 ‘한여름 밤의 꿈’ 제작발표회에서 “단체 성격에 맞는 선장을 모셔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새로운 예술 감독이 국제적인 네트워크나 발레계 흐름과 관련 있는 분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1년 정도 시간을 갖고 운영하면서 단장과 예술감독을 모실 계획이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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