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보이스 오케스트라 이마에스트리가 3D 창작오페라 ‘이순신’을 초연하고 있다. ⓒ이마에스트리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2막의 3장은 경남 통영의 세병관에서 시작된다. 세병관은 삼도수군통제사의 지휘부인 삼도수군통제영의 중심 건물이다.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자, 선조는 옥에 갇혀 있는 이순신을 다시 경상·전라·충청도 수군을 총괄하는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빈껍데기만 남은 해군을 떠안게 된 이순신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 같은 조선의 운명을 걱정하며 시조 한 수를 써내려간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笳)는 나의 애를 끊나니” 이 유명한 시조가 노래가 되어 흘렀다.

“달빛 사이로 흐르는 비탄의 피리 소리는 왜 나를 깨우는가.” 엄숙하고 비장했다. 대금 소리와 어우러진 이순신의 결연한 목소리가 관객 가슴으로 비집고 들어와 박혔다. 차가운 얼음덩이 같다. 온통 나라 걱정뿐인 한 사나이가 우뚝 서있다. 그리고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산산이 산산이 부서질지라도 자유를 위해 평화를 위해 헤쳐 나가 끝내 승리하리라”라는 대장부의 굳은 다짐이 이어졌다. 우국충정이 뭉클하다. 애국심을 샘솟게 한다.

날이 밝았다. 아침부터 수군들이 분주하게 전투를 준비한다. 비록 병력은 열세지만 사기는 하늘을 찌른다. 그러나 느닷없이 선조의 명령이 도착한다. “육지에 올라 도원수 권율을 돕도록 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것. 바다를 포기하라고! 전쟁의 판세를 잘못 읽은 오판이다. 바다를 버리는 것은 조선을 버리는 것이다. 장군은 급히 장계(왕에게 보내는 문서)를 올린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한 글자 한 글자에 정성을 다한다.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전선수과(戰船雖寡) 미신불사즉(微臣不死則) 불감모아의(不敢侮我矣)’라고 적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전선의 수가 절대 부족하지만, 보잘 것 없는 신이 살아 있는 한 감히 적은 조선의 바다를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뜻이다. 나라를 생각하는 절절한 마음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이 글에서 힌트를 얻어 아리아를 만들었다.

이순신은 병사들의 용기를 북돋고, 부하들은 그런 장군의 뜻을 따르겠다는 승전 결의가다. “깊은 밤 소리 없는 침묵의 바다/ 해와 달도 빛을 잃고 어두운 데/ 멀리서 들리는 전쟁의 북소리/ 칼에 베어 버려진 주검마다/ 하얀 옷에 피맺힌 통곡 있네/ 결연히 일어나라/ 일어나라/ 내가 죽어 길을 열리라/ 내가 죽어 길을 열리라/ 앞서 가니 나를 따르라/ 우리/ 우리/ 끝내 이기리라” 거센 물결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순신과 수군들의 함성이 우렁차다.

남성 보이스 오케스트라 이마에스트리가 3D 창작오페라 ‘이순신’을 초연하고 있다. ⓒ이마에스트리 제공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거북선 함대가 서울에 상륙했다. 남성 보이스 오케스트라 이마에스트리(I MAESTRI)는 창작 오페라 ‘이순신’을 세계 초연했다. 지난 4월 25일부터 27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팬들을 만났다. 첫날 공연을 감상했다.

‘이순신’이 무대에 오르는 데는 양재무 예술감독의 ‘공’이 컸다. 겉으로는 1인 3역이지만 실제는 ‘1인 10역’쯤 된다. 작곡과 지휘는 물론이고 대본(협력작가 김혁수·배상렬)까지 직접 썼다. 보통 오페라의 경우 대본가와 작곡가가 따로 작업하지만, 이 두 가지 일을 한 사람이 맡았고 거기에 더해 지휘봉까지 잡은 드문 케이스다.

음악과 서사가 유기적으로 결합돼 완성도 탄탄한 드라마가 탄생했다. 양 감독은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대본작업까지 도맡았다”라며 “이런 덕분에 대본가·작곡가·지휘자의 시각에서 본 음악적 흐름과 감정선이 촘촘하게 흐르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요즘말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갈아 넣은 오페라인 셈이다.

이번 작품은 이순신 장군(1545~1598) 탄신 480주년과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제작됐다. 또한 이마에스트리 창단 2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한 작품이기도 하다. 양 감독은 공연날짜와 공연장소에도 각별한 신경을 썼다. 4월 28일은 이순신 장군의 양력 생일(음력 생일은 윤 3월8일)이다. 그래서 공연 날짜를 일부러 25·26·27일로 잡았다. 세심한 정성이 빛난다.

장군은 남산 자락의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건천(乾川)은 마를 건(乾)과 내 천(川)이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다. 순우리말로 바꾸면 ‘마른내’다. 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과 초동 일대를 옛날에는 마른내라고 불렀다. 그래서 새로 바뀐 주소명도 ‘마른내로’다. 국립극장도 남산 자락에 있다. 이순신 장군이 태어나 곳과 가장 가까운 곳을 공연장소로 골랐다. 장군의 정신을 이어받으려는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선택이다.

남성 보이스 오케스트라 이마에스트리가 3D 창작오페라 ‘이순신’을 초연하고 있다. ⓒ이마에스트리 제공


오페라 ‘이순신’은 모두 3막 7장으로 구성됐다. 곳곳에 우리 전통 민요 가락을 차용했지만 현대화성으로 변환해 세련미를 더했다. 오페라의 막을 연 서곡은 한국민요 ‘아리랑’과 일본민요 ‘사쿠라’를 교차해 흐르게 했다. 평화로운 조선이 일본의 침략으로 혼란에 빠지지만 결국 승리한다는 메시지를 담아냈다.

1막은 한양 광화문 앞(1장)에서 시작돼 여수 진남관에서의 거북선 탄생(2장), 즐거운 주막 모습(3장)으로 이루어졌다. 이순신의 아리아(‘아름다운 조국 찬란한 조선이여’), 거북선의 노래(‘강철을 두드려 거북선을 만들자’), 수군들의 합창(‘무장한 수군들이여’) 등이 국립극장 천장을 쿵쿵쿵 울렸다.

‘실질적인’ 산학협력도 눈에 띄었다. 수군들의 훈련 장면에 백석대학교 태권도팀이 출연해 멋진 동작을 보여줬다. 공중제비, 풍차돌리기 등 고난도 기술을 집어넣어 보는 재미를 선사했다. “얍~” 쩌렁 쩌렁 기합소리가 우렁차다. 또한 주막 장면에서는 백석예술대학교 연기과 재학생·졸업생들이 출연해 흥겨운 신(scene)을 멋지게 소화했다. 수군들과 함께 ‘막걸리! 내일 위해 마셔보세! 막사발의 막걸리’를 부를 땐, 그 어떤 어려움도 이기며 끝내 다시 일어서는 끈질긴 민초들의 삶이 오버랩됐다. 백석예술대 미용과 학생들은 출연자들의 분장을 책임졌고, 가천대학교 학생들은 미디어 홍보를 담당해 바이럴 마케팅을 수행했다.

남성 보이스 오케스트라 이마에스트리가 3D 창작오페라 ‘이순신’을 초연하고 있다. ⓒ이마에스트리 제공


2막은 긴박했다. 이순신 장군의 24척 판옥선과 일본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수백척 안택선이 울돌목에서 대치하고(1장), 전쟁으로 폐허가 된 주막을 배경으로 모함을 받아 한양으로 끌려가는 이순신의 모습을 담았다(2장). 3장은 이 오페라의 극적인 하이라이트인 ‘한산섬 달 밝은 밤에’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가 장식했다.

일본으로 붙잡혀 가는 조선 노예들의 합창(‘끌려가네, 정든 고향 두고 가네’), 류성룡의 아리아(‘진실의 빛이여, 어둠을 높이 비춰라)’, 이순신과 류성룡의 이중창(‘신성한 불꽃, 불타올라라’) 등은 가슴을 울렸다. 오페라 ‘이순신’은 ‘이순신과 류성룡의 위대한 만남’이라는 부제목을 달고 있다. 이순신만큼 류성룡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이마에스트리 단원들은 세계적인 성악가들이다. 모두 주연급 실력을 갖추고 있다. 이순신 역은 테너 김충희·김지호·이규철, 류성룡 역은 바리톤 안대현·한경석·박정민이 연기했다. 선조 역은 테너 강신모·이인학·전병호, 원균 역은 테너 김성진·오상택·하세훈, 와키자카 야스하루 역은 바리톤 나의석·최병혁·석상근, 진린 역은 바리톤 방광식·유진호 등이 맡았다. 이름을 올리지 않았지만 수군 1·2·3이나 백성 1·2·3·4·5 등 모두는 톱클래스 가수들이다.

오페라 ‘이순신’은 최첨단 3D 입체영상으로 무대를 구현했다. 무대 뒤와 옆이 거대한 스크린이 돼 영화처럼 영상이 펼쳐졌다. 눈앞에 거북선이 등장해 적을 향해 돌진했고, 적과의 치열한 해전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마치 전장의 한가운데에 있는 듯한 생생한 몰입감을 선사했다. 새로운 형태의 융합 공연 예술을 실현해냈다. 음악과 기술, 역사와 드라마가 조화를 이루는 작품으로 전통 오페라의 경계를 확장하며 한국 창작 오페라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막과 막 사이, 장과 장 사이는 인터벌 없이 빠르게 전환돼 속도감을 느끼게 해줬다.

3막은 이순신 장군의 최후 결전을 담았다. 왜군의 유탄에 맞아 숨을 거두면서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너희는 강해야 한다. 나는 조선을 사랑한다”라고 노래할 때 모두들 뭉클했다.

커튼콜 때는 모든 출연자들이 무대로 나와 ‘승리의 대합창’을 다시 불렀다. 왼쪽과 오른쪽에서 큰 깃발을 흔들며 관객들의 호응을 유도했고, 무대 뒤엔 숭례문에서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서울 도심의 현재 모습을 보여줘 우리 역사가 도도히 흐르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뒤를 든든하게 지탱해준 제작 라인업 덕에 성공적인 초연이 됐다. 연출 김지우, 음악코치 김성희·박성은, 대금 신재현, 편곡 장민호·정현식·유형재·유재현·양혜민, 연주 프라임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힘을 보탰다.

공연을 본 관객들의 호평이 이어졌다. 창작 오페라에 목말라했던 팬들에 시원한 빗줄기 역할을 했다. 관객 대부분은 “음악이 훌륭했다. 근래 보기 드문 4관 편성에 타악기까지 4명 포진해 귀를 때리는 입체적 사운드가 압권이었다"며 “남성 성악가들의 우렁찬 합창이 선 굵은 드라마와 딱 맞아떨어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보완과정에서 긴장과 이완이 적절하게 믹스된 ‘단짠 스타일’을 가미하면 훨씬 더 짜임새 있는 오페라가 될 것이다”라며 “첫술에 배부를 순 없으니 계속 업그레이드하면 된다”며 솔루션을 제시하기도 했다.

물론 쓴소리도 있었다. “커다란 서사만 있지 작은 재미가 없다” “연출의 묘미가 엿보이지 않았다” “기억나는 멜로디를 가진 노래가 들리지 않았다” 등의 아쉬움을 드러냈다.

<백브리핑> 감동 한 번 더 앙코르...29일·30일 0시에 KBS-1TV 녹화방송

남성 보이스 오케스트라 이마에스트리가 3D 창작오페라 ‘이순신’을 초연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이마에스트리 제공


오페라 ‘이순신’은 막을 내렸지만, ‘이순신’은 여전히 현재진행이다. 공연을 못 본 사람들을 위해 KBS-1TV에서 녹화 방송한다. 5월 29일(목)과 30일(금) 0시께에 방송된다, 다시 한 번 도 감동을 느끼려면 본방을 사수하라.

‘이순신’이 입소문을 타면서 양재무 감독의 강연도 이어지고 있다. 양 감독은 5월 29일(목) 오전 11시 고대교우회관 안암홀에서 열리는 제458회 고대월례강좌에 연사로 나온다. 그는 이번 오페라 이순신의 작곡과 제작 과정을 들려준다. 테너 하세훈과 피아니스트 박성은도 함께 참석해 오페라 속 대표곡을 연주한다.

/eunki@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