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너 석상근이 지난 10일 광림아트센터 장천홀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노래하고 있다. ⓒ에프엠아키텍트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석상근은 성악을 시작한 이후 30년 넘게 바리톤으로 활약해 왔다. 50세를 넘긴 그가 용감한 도전에 나섰다. 음역대를 높여 테너로 변신한 것. 오페라 가수가 이처럼 포지션을 바꾸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것도 높은 음에서 낮은 음으로가 아니라 ‘낮은 음에서 높은 음으로’는 희귀한 사례다. 요즘말로 역주행이다.
지난 10월 10일 서울 광림아트센터 장천홀. ‘테너 석상근’의 첫 공식무대가 열렸다. 프로그램북을 살펴보니 ‘테리톤(Teritone)’으로 표기돼 있다. 테너(Tenor)와 바리톤(Baritone)을 합성한 신조어다. 두 음역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으니 남들이 탐낼만한 경쟁력 있는 무기를 갖춘 셈이다.
김기웅이 지휘하는 소리얼 오케스트라가 음악회의 문을 열었다. 피에트로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인터메조를 연주했다. 부활절 아침, 시칠리아에서 벌어진 치정에 얽힌 비극적 죽음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는 오페라의 간주곡다.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잠시 찾아온 고요가 연상됐다. 알 파치노가 주인공을 맡은 ‘대부3’에 삽입되기도 했는데, 음악이 흐르는 동안 영화 장면이 무대 위 스크린을 비추며 시각적 재미도 선사했다.
본격적으로 석상근의 시간이 시작됐다. 무대에 등장한 그는 살바토레 카르딜로의 ‘Core ’ngrato(무정한 마음)’을 첫 곡으로 들려줬다. 연인에게 버림받은 화자의 절절한 심정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카타리~ 카타리~”라고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며 원망하는 남자의 마음은 단순한 탄식이 아니라 폭발적인 감정의 분출이다.
그는 입담이 좋다. “노래가 끝나면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박수를 쳐줘야 합니다. 그래야 성악가들이 조금 더 쉬고 힘을 낼 수 있습니다. 다음 곡을 더 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관객들의 몫입니다”라고 재치 넘치는 멘트를 날렸다.
“나는 오늘 테너야”를 입증하듯, 석상근은 유명 오페라 속 시그니처 아리아 세 곡을 잇따라 노래했다. 테너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명곡이지만, 부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진땀나는 곡들이다.
먼저 자코모 푸치니의 ‘토스카’에 나오는 카바라도시로 완벽 빙의해 ‘E lucevan le stelle(별은 빛나건만)’를 선사했다. 감옥에 갇혀 곧 죽음을 앞두고 있는 한 사내가 연인과 함께했던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절절한 아름다움을 토해냈다.
이어 프란체스코 칠레아의 ‘아를의 여인’에 나오는 ‘Lamento di Federico(페데리코의 탄식)’와 루제로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 중 ‘Vesti la giubba(의상을 입어라)’를 들려줬다.
마음에 품은 여자가 다른 남자와 깊이 사귀었다는 ‘과거’를 알게 된 페데리코가 실망감에 빠져 부르는 슬픔은 드라마틱했다. 또한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고 극심한 고통과 절망에 빠진 유랑극단의 우두머리 카니오가 토해내는 아픔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넓었다. ‘카니오 석상근’은 광대 의상을 입고 관객 앞에서 노래해야 하는 예술가의 비극적 운명을 멋지게 보여줬다. 극적인 선율을 타고 강렬한 감정이 넘실거렸다.
“이렇게 해서 ‘테너 석상근’이 데뷔를 했습니다. 마지막 노래(‘의상을 입어라’)는 진짜 힘들었어요. 연달아 부르니 과부하가 걸렸습니다. 속으로 ‘그냥 바리톤할 걸’이라고 후회의 마음도 들었습니다. 리허설 때는 잘 됐는데, 실전에서 살짝 미스했어요. 속상합니다. 그래도 많은 곡을 많이 준비했으니 끝까지 즐겨 주세요.”
테너 석상근이 지난 10일 광림아트센터 장천홀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출연자들과 함께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에프엠아키텍트 제공
석상근은 그레이스 재즈 콰르텟과 호흡을 맞춰 ‘팔색조 매력’을 뽐냈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줄게/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윤복희가 불러 히트한 ‘여러분’(윤향기 작사·작곡)을 연주했다.
석상근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늦깎이로 성악을 시작했다. 뒤처진 출발에도 이탈리아 피에트로 마스카니 국립음악원을 수석졸업하고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7차례 1위를 거머쥐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모든 공연이 멈춘 시기에 그도 먹고 사는 현실적 문제에 직면했다. 그래서 1톤 탑차를 운전하며 배송 설치 기사로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여러분’ 노래를 부르는 동안 냉장고를 나르고, 안마의자를 옮기고, 타이 음식점 점장과 제빵 보조로 일하던 시기의 사진들이 스크린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때에도 결코 예술의 끈을 놓지 않았던 한 아티스트의 지난날이 뭉클한 감동으로 전달됐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편지’(고은 시·김민기 곡)는 지금 시즌에 딱 들어맞는 맞춤곡 이었다.
‘동막골 이야기’(오두영 시·정애련 곡)는 정감이 넘쳤다. “겨울밤 칭얼대는 어린 아이에게/ ‘곶감 줄까’ 할머니 한마디 말씀에/ 아이 울음은 뚝, 그쳤네/ 문 밖에 호랑이는/ 슬그머니 어디론가 사라져 가고” 한국적 정서 가득한 풍경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강주희의 태평소와 권운의 장구도 가세했다.
‘Fly Me to the Moon’(바트 하워드 작곡)과 ‘Bésame Mucho’(콘수엘로 벨라스케스 작곡)는 “저의 다양한 면을 보여주고 싶어 선곡했다”는 석상근의 말처럼, 그의 폭넓은 음악 스펙트럼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혼자는 외롭다. 든든한 지원군이 석상근 공연에 힘을 보탰다. 바이올리니스트 이서현이다 프란츠 크라이슬러의 ‘Liebesleid(사랑의 슬픔)’와 토마소 안토니오 비탈리의 ‘Chaconne(샤콘느)’를 연주했다. 두 곡 모두 익숙한 곡들이라 더 반가웠다. 임재범이 불러 유명해진 ‘너를 위해’(신재홍 작곡)는 바이올린 선율에 그레이스 재즈 콰르텟뿐만 아니라 태평소 연주까지 곁들여 풍성했다.
다시 석상근이 등장했다. 오페라 아리아, 대중가요, 한국가곡, 재즈 등에 이어 이번엔 뮤지컬 넘버로 갈아탔다. ‘지킬 앤 하이드’에 나오는 ‘지금 이 순간’(프랭크 와일드혼 작곡)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석상근에게 이번 콘서트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제자인 바리톤 김봉중을 응원하기 위한 음악회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봉중은 이탈리아에서 프로 성악가로 활동하던 중 바이러스 감염으로 시력을 잃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제자의 힘찬 여정을 돕고 싶어 이번 공연에 함께했다.
두 사람은 ‘My Way(나의 길)’를 불렀다. 자크 루보와 질 틸보가 작곡했고 프랑스 가수 클로드 프랑수아가 ‘Comme D’habitude’(콤 다뷔튀드·‘평소처럼’ ‘습관처럼’이라는 뜻)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가수 폴 앵카는 이 곡에 듣고 반해 영어 가사를 새로 붙인 뒤 프랭크 사나트라에게 ‘My Way’라는 제목으로 줬다.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묵묵히 나의 길을 가겠다는 굳은 다짐의 노래는 아름다웠다.
앙코르는 콘서트를 응원하러 온 후배들과 함께 깜짝 무대로 꾸몄다. 지미 폰타나의 ‘Il Mondo’(세상)와 자코모 푸치니의 ‘Nesun Dorma(아무도 잠들지 마라)’를 선물했다. 웅장함과 세밀함이 적절하게 믹스돼 귀호강을 안겨줬다.
이번 콘서트는 최종호 대표가 이끌고 있는 에프엠아키텍트가 주최했다. 한 모임에서 석상근을 우연히 만나 인연이 시작됐고, 성악가로서의 인품과 재능에 반한 최 대표는 열렬한 후원자가 됐다. 독창회를 열어주고 싶어 공연기획사까지 만들어 지원하고 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두 사람은 1993년 추운 겨울, 강원도 철원의 한 부대 신병교육대에 같이 훈련은 받은 군대 동기였다. 최 대표는 총예술감독을 맡아 A부터 Z까지 꼼꼼하게 음악회를 준비했으며, 2부에서는 포디움에 올라 지휘도 했다. 공연이 끝난 뒤 석상근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공연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것은 뜨거운 박수와 응원을 보내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비가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귀한시간을 내어 함께 해주셔서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시각장애인 제자 김봉중과 함께한 공연은 저에게 가슴 뭉클하고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저희들의 노래는 단순한 음표와 가사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잇는 아름다운 하모니였습니다. 음악을 통해 전달되는 감정은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연결해주며 관객들과 저 사이에 특별한 유대감을 형성해주었습니다. 저희들이 만들어낸 선율과 리듬이 오신 분들의 가슴 속에 남아 계속해서 울려 퍼지기를 소망합니다. 음악은 삶의 여러 순간들을 함께 나누고 소통하게 해주는 힘이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제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감동적인 노래와 음악으로 보답하면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park72@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