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손열음 등 5명이 차린 송년음악파티...웰컴뮤직·고별퇴장 등 깨알재미 넘쳤다

파이플랜즈 아티스트들과 함께 다섯번째 ‘커튼콜’
스베틀린 루세브·조성현·함경·유지인과 합동무대

2023년 발매한 신상 음반의 곡들로 프로그램 구성
작곡가 손일훈의 피아노곡 ‘멜로우’ 고막여친 등극

민은기 기자 승인 2024.01.02 17:48 | 최종 수정 2024.01.02 18:13 의견 0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첼리스트 유지인이 지난 28일 열린 다섯번째 ‘커튼콜’에서 풀랑크의 첼로 소나타를 연주한 뒤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다. ⓒ파이플랜즈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공연 시작 10분 전에 입장했는데 어디선가 오보에 소리가 들렸다. 합창석 오른쪽 계단에서 함경이 ‘웰컴 뮤직’을 들려주고 있었다. 이런 깨알재미를 놓치다니. 좀 더 일찍 들어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플루티스트 조성현(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파르티타 a단조’ 중 사라방드, 크반츠 ‘전주곡 D장조’)→바이올리니스트 스베틀린 루세브(파가니니 ‘카프리스 13번’, 크라이슬러 ‘레치타티보와 스케르초-카프리스’)→오보이스트 함경(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소나타 a단조’ 2악장 알레그로)이 메인공연에 앞서 분위기를 띄우는 연주를 했는데 마지막 순서만 볼 수 있었다. 디너로 따지자면 애피타이저를 놓친 셈. 전채요리를 맛보지 못했으니 메인요리에 최대한 집중했다.

지난 28일 오후 7시30분.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로 걸어 나왔다. 1부 첫 곡으로 샤를-발랑탱 알캉(1813~1888)의 ‘슈타이벨트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선사했다. 작곡가 이름이 낯설다. 곡명도 귀에 익숙하지 않다. 정성스럽게 써내려간 프로그램북을 살펴보니 제대로 몰랐을 뿐 멀리 있는 사람과 노래는 아니다.

샤를-발랑탱 알캉은 여섯 살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한 신동이다. 프레데릭 쇼팽, 프란츠 리스트 등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피아노의 귀재다. 그의 작품번호 1번이 ‘슈타이벨트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다.

다니엘 슈타이벨트는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즉흥 연주 라이벌’로도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이 주제는 그의 피아노 협주곡 3번(Op.33) 가운데 ‘폭풍’을 표현한 3악장에 등장하는 테마다.

손열음은 두 손을 깍지 끼고 한 번 손을 풀어주더니 ‘콰광~’ 재빠르게 도입부를 치고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시작이지만 이내 서정적 모드로 전환했다. 물방울이 돌돌돌 굴러가며 수면에 방울을 튕겼다. 화려한 기교와 아름다운 고음은 산뜻하고 경쾌한 출발에 안성맞춤이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0번을 연주한 뒤 관객에게 박수를 받고 있다. ⓒ파이플랜즈 제공


오프닝을 연 손열음이 마이크를 들었다. “한해를 마무리하며 선물 같은 공연을 준비했다. 벌써 다섯 번째 ‘커튼콜’이다”라며 “이 곡은 올해 처음 배워 연주했는데 농담 같은 곡, 장난 같은 곡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번 송년공연에 대한 전체적인 레이아웃을 밝혔다.

“금년은 행복한 순간이 많았습니다. 예전에는 행복의 시간이 찾아오면 늘 불안했어요. ‘이 행복이 끝나면 곧 안좋은 일이 찾아오겠지’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완전히 떨쳐 냈습니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즐기면 된다는 것을 깨우쳤습니다. 그리고 감사한 일이 많았어요. 펜데믹에서 엔데믹으로 전환되면서 공연이 많아졌잖아요. 서울에서만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공연 2회, 국립국장 여우락 페스티벌, 고잉홈프로젝트 3회, 도이치방송오케스트라 협연 등 일곱 번 무대에 섰어요, 전석 매진 시켜준 관객 여러분 고맙습니다.”

이어 ‘커튼콜’을 관통하는 테마를 설명했다. “어떤 주제를 엮을까 고민하다가 음반으로 결정했다. 올해 파이플랜즈에 소속된 아티스트들이 하나씩 앨범을 냈다. 앨범에 들어있는 곡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다만 ‘슈타이벨트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예외다”라고 덧붙였다.

손열음이 연주한 두 번째 곡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의 피아노 소나타 10번. “올해 모차르트 소나타 18곡 전곡 음반 발매를 기념해 전국 리사이틀을 열었다. 투어를 마치고 관객들에게 다시 듣고 싶은 곡이 무엇이냐고 물어봤다. 결과가 의외였다. 10번(K 330)을 선택했다. 전체적으로 밝고 순수한 모습이 가득한 점이 크게 어필한 것 같다”며 “모차르트는 겉보기에 쉬운 것 같지만 어렵다. 수직과 수평의 중간 지점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힘들다. 외줄 타는 기분이다”고 말해 연주자의 고통을 고백했다.

1악장은 아무 걱정 없는 천진난만 모차르트의 얼굴이 연상됐고, 2악장은 동네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며 숨어있는데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지는 마음을 닮았다. 3악장은 다시 통통 튀는 활기를 되찾으며 마무리됐다. 애써 배우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던 신동 모차르트의 음악이 손열음의 손끝을 타고 배달됐다.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첼리스트 유지인이 라흐마니노프의 ‘첼로 소나타 g단조’를 연주하고 있다 . ⓒ파이플랜즈 제공


“올해는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 탄생 150주년이자 서거 80주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하나 골랐습니다. 그를 추억하고자 선곡했어요. 연주를 해줄 첼리스트 유지인은 올해 스무 살입니다. 세계적 첼리스트 고티에 카푸숑 재단의 후원을 받고 있어요. 최근 재단 수혜자 중 단 3명을 선발해 음반을 만드는 프로젝트에 참가해 6월에 합동앨범을 내놓았습니다. 라흐마니노프 곡은 수록되지 않았지만, 풀랑크 곡은 들어있습니다.”

라흐마니노프 인생 최대 시련은 1번 교향곡 때문에 발생했다. 초연 실패는 그를 폐인으로 만들었다.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에 빠져 어떤 작품도 만들지 못했다. 신랄한 비평은 영혼을 무참히 짓밟았다. 최면 요법을 통한 심리 치료로 유명한 니콜라아 달 박사의 도움으로 3년 동안의 긴 어둠 속에서 빠져 나와 히트곡을 쏟아냈다. ‘피아노 협주곡 2번’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2번’ 그리고 ‘첼로 소나타 g단조’다.

유지인과 손열음은 이 첼로 소나타 g단조(Op.19) 3악장을 연주했다. ‘고통의 기억을 감내하고 도전해 끝내 쟁취하는’ 낭만주의 음악의 정신과 더불어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솔직한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곡이다. 두 사람은 음마다 숨어있는 처연한 슬픔을 꺼내 놓았다. 어둠 속으로 아득히 사라지는 종결은 여운이 길었다.

프란시스 풀랑크(1899~1963)는 클로드 드뷔시나 에릭 사티처럼 프랑스적인 색채와 정신을 잘 담아낸 작곡가다. 세련된 감각으로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한 사람이었고, 어린이도 어른도 모두 좋아하는 친근한 음악을 만든 사람이었다. 그의 첼로 소나타(FP 143)는 20세기 최고의 첼로 거장 중 한 사람인 피에르 푸르니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유지인과 손열음은 3악장과 4악장을 들려줬다. 감미로운 선율과 멜랑콜리한 화성, 그와는 상반된 지극히 명료한 형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피치카토로 선사한 현의 울림은 살짝 불협화음이 연상됐고(3악장), 묵직한 저음 뒤로 얼핏 고개를 내미는 가냘픈 선율은 현대적 필을 풍겼다.(4악장)

바이올리니스트 스베틀린 루세브가 ‘레치타티보와 스케르츠-카프리스 작품번호 6번’을 연주하고 있다. ⓒ파이플랜즈 제공


프리츠 크라이슬러(1875~1962)는 ‘사랑의 기쁨’ ‘사랑의 슬픔’ ‘아름다운 로즈마린’ 등 우리 귀에 익숙한 명곡을 만들었다. ‘레치타티보와 스케르츠-카프리스 작품번호 6번’은 절친한 동료였던 외젠 이자이에게 헌정됐다. 다양한 스케일과 트릴, 그리고 전형적이지 않은 화성을 사용하는 어려운 기교의 곡이다. 크라이슬러 특유의 스타일이 드러나면서도 바이올린이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음색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스베틀린 루세브는 무반주 연주했다. 웰컴뮤직에서 보여줬던 그 곡이다. 레치타티보는 드라마틱하고 엄숙한 독백이었다. 깊은 소리의 저음부터 귀를 자극하는 고음까지 넓은 음역대를 오고가며 긴장감을 유지했다. 이어 장난스러우면서도 밝은 스케르초가 빠르게 흘렀다. 갈수록 어려워졌지만 유머러스하게 장단조를 번갈아 사용하며 가볍게 여유를 부렸다.

바이올리니스트 스베틀린 루세브가 손열음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블라디게로프의 ‘호로’를 연주하고 있다. ⓒ파이플랜즈 제공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판초 블라디게로프(1899~1978)는 불가리아를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다. 생동감 넘치고 감성적 표현이 풍부했다. 또 매우 세련되고 정교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블라디게로프의 음악적 팬이었다. 1920년대 잘츠부르크 음악원 학생이었던 카라얀은 졸업연주회에 블라디게로프를 초청했다. 카라얀이 포디움에 섰고 블라디게로프는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했다. 이후에는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피아니스트 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 등이 블라디게로프의 곡을 연주해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루세브는 손열음과 함께 블라디게로프의 ‘호로(Op.18)’을 연주했다. ‘2개의 불가리아 패러프레이즈(Op.18)’ 중 첫 번째 곡이다. 호로는 실내에서 둥글게 모여 추는 사교 댄스를 뜻한다. 루세브의 말을 손열음이 통역했다,

“다뉴브 강(독일어로는 도나우 강)은 유럽을 가로지르는 큰 강입니다. 무려 10개국에 걸쳐 흐릅니다. 그래서 다뉴브 강을 주제로 열 개 나라의 곡을 묶은 앨범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다뉴브 프로젝트는 이미 녹음을 시작했습니다. 루마니아 저의 고향집을 나서면 100m 거리에 다뉴브 강이 흐르죠. 달콤한 곡은 아니지만 중독성이 있습니다.”

앞서 연주했던 ‘레치타티보와 스케르츠-카프리스’는 오스트리아의 대표곡으로, ‘호로는 불가리아의 대표곡으로 음반에 넣을 예정이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보내듯 뜨거운 노래와 모두가 즐겁게 춤추는 에너지가 번갈아 나오며 점점 흥을 돋웠다. 서유럽의 작품과는 결이 다른 불가리아 특유의 낭만이 넘실거렸다.

플루티스트 조성현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파르티타 a단조’ 1악장 알레망드를 연주하고 있다. ⓒ파이플랜즈 제공


2부가 시작됐다. 조성현이 왼쪽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며 플루트를 불었다. ‘피리 부는 사나이’였다. 단조로운 무대에 액센트를 주는 역시 깨알 퍼포먼스다. 어둠을 뚫고 조명이 비쳐져있는 무대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가 흘렀다. ‘파르티타 a단조(BWV 1013)’ 1악장 알레망드다.

파르티타는 주로 바로크 시대에 작곡된 독주 악기 작품집을 가리키는 제목이다. 바흐는 여러 춤곡을 모은 다수의 파르티타 작품을 다수의 악기를 위해 남겼다. 그 중에서도 조성현이 연주한 독주 플루트를 위한 파르티타 작품은 퍼즐을 닮았다. 시작부터 끝까지 단선율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멜로디 속에 은은히 배어있는 화성, 혼자 연주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두 개 이상의 성부로 역할이 나누어진 부분, 좀처럼 끊이지 않고 길게 이어지는 음악적 흐름이 촘촘하다. 세심하게 짤 짜여있다. 조성현이 마이크를 잡았다.

“제게 아주 특별한 곡입니다. 음악적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죠. 6월에 선보인 앨범 ‘바흐’에 수록됐습니다. 두성과 어우러져 들숨이 크게 들립니다. 오히려 이것이 생명을 불어 넣는 효과를 줍니다. 바로크 시대에 플루트와 오보에는 악기의 왕이었습니다. 함경과 듀엣으로 만든 음반 ‘바흐’는 아버지 바흐뿐만 아니라 그의 두 아들(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빌헬름 프리데만)에도 초점을 맞췄습니다.”

오보이스트 함경이 합창석에서 손일훈 작곡가의 ‘나르키소스’를 연주하고 있다. ⓒ파이플랜즈 제공

이번에는 작곡가 손일훈이 무대로 나왔다. 그는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청년 나르키소스에서 유래한 ‘나르시즘’은 지나친 자기애를 뜻한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자기애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사람도 많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눈치 보고, 쉽게 상처 받고, 그 탓을 자신에게 돌리곤 한다. 건강한 자존감이 결여돼 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나르키소스’를 작곡해 11월에 디지털 싱글로 발표했다. 원래는 리코더를 위해 작곡했다”라고 말했다.

합창석에서 웰컴뮤직을 선사했던 함경이 다시 합창석 정중앙에 섰다. 보면대 3개를 이어 악보를 죽 펼쳐 놓고 따끈따끈 신상 작품을 들려줬다. 멜로디는 단순해 보였지만 울림이 컸다. 음이 증폭되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소리 같았다. 자신의 자존감을 비쳐주는 샘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곡이다. 스스로 자신을 더 사랑하기를 바라는 작곡가의 진심이 전해졌다.

플루티스트 조성현과 오보이스트 함경이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의 ‘플루트와 오보에를 위한 여섯 개의 듀엣’ 중 3번을 연주하고 있다. ⓒ파이플랜즈 제공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1710~17884)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장남이다. 작곡뿐만 아니라 뛰어난 건반악기 연주자로도 유명했지만 인생은 잘 풀리지 않았다. 작업량에 비해 수입이 적어 여러 번 일자리를 찾아 도시를 옮겨 다녔다. 평생 궁핍한 생활에 시달렸다. ‘플루트와 오보에를 위한 여섯 개의 듀엣’은 그의 대표작이다.

조성현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듀엣곡 6개 가운데 3번 내림E장조를 연주할 겁니다. 저와 함경, 두 사람이 서로 아끼는 곡입니다. 무대에서 공식적으로 첫 연주합니다”라며 1악장 알레그로, 2악장 아디지오 마 논 몰토, 3악장 프레스토를 선사했다. 주거니 받거니 케미가 정겨웠다. 오보에의 경쾌한 발걸음에 맞춰 플루트가 걸어가더니, 어느새 반걸음 앞서나갔다. 또 뒤따르던 오보에는 “내가 먼저 갈게”리며 슬며시 치고 나갔다.

작곡가 손일훈이 ‘피아노를 위한 발라드’ 모음곡 중 첫번째 곡인 멜로우를 소개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오른쪽은 피아니스트 손열음. ⓒ파이플랜즈 제공


손일훈이 다시 나왔다. “발라드와 재즈 느낌의 곡을 만들고 싶었어요. 2021년에 발매한 손열음의 앨범 ‘카푸스틴’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음반을 듣고 그래 한번 해보자 결심했습니다. 세 곡으로 구성된 ‘피아노를 위한 발라드’ 모음곡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중 첫 번째 곡 ‘멜로우’를 공개합니다.

손열음이 말을 이어 받았다. “손일훈 작곡가가 가곡 음원을 발표했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작품에 곡을 붙인 ‘소망’이라는 곡입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나왔습니다. 많이들 다운받아 주세요.”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손일훈 작곡가의 ‘피아노를 위한 발라드’ 모음곡 중 첫번째 곡인 멜로우를 연주하고 있다. ⓒ파이플랜즈 제공


정이 넘치는 호객행위로 웃음을 안겨준 뒤 손열음은 사랑 이야기를 아름답게 들려줬다.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다. 썸인가, 아니면 짝사랑인가. 다시 만나자고 말했어야 했는데 못하고 헤어진 게 너무 아쉽다. 머릿속으로 행복하게 함께 사는 모습까지 그려본다. 너무 앞서나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마음이 이렇게 두근거릴까. 환하게 웃는 그녀의 눈동자가 별처럼 빛난다. 아직 연락하지 못한 채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다 잠이 든다’ 등 작곡가의 노트에 써있는 이런 복합감정이 손열음의 손가락에서 뿜어져 나왔다.

손열음, 스베틀린 루세브, 조성현, 함경, 유지인 등 5명이 손일훈이 편곡한 라벨의 ‘어미 거위 모음곡’을 연주하고 있다. ⓒ파이플랜즈 제공


피날레 곡은 모리스 라벨(1875~1937)의 ‘어미 거위 모음곡’. 손열음, 루세브, 조성현, 함경, 유지인이 5중주로 연주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라벨은 친한 예술적 동료였던 고뎁스키 부부의 두 자녀(여섯 살 미미와 일곱 살 장)를 위해 이 곡을 썼다.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던 라벨은 집을 방문할 때마다 동화책을 읽어주며 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각각 다섯 개의 다른 동화 속 장면을 음악적으로 묘사해 놓았다.

‘어미 거위 모음곡’은 ‘잠자는 숲속의 미녀’ ‘장화 신은 고양이’ ‘신데렐라’ 등을 쓴 동화작가 샤를 페로가 집필한 동화집의 이름이다. ‘어미 거위 이야기, 또는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동화집은 위의 세 이야기 외에도 ‘빨간 모자’ ‘푸른 수염’ ‘엄지 동자’ 등 모두 11편이 동화가 실렸다.

라벨의 ‘어미 거위 모음곡’에는 정작 거위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 제목에 어미 거위가 들어갔을까. 서양에서 어미 거위는 어린이를 위해 만든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동요, 자장가를 불러주던 상상 속의 존재다. 페로의 동화집이 출판되면서 어린이를 위한 노래를 모두 ‘어미 거위 노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손일훈은 “원래는 피아노 포 핸즈(Four Hands)곡이다. 라벨은 나중에 오케스트라 버전으로도 편곡했다. 피아니스트는 당연히 피아노 곡으로 접근하고, 바이올린·첼로·플루트·오보에는 관현악곡으로 접근했다. 그래서 원작 2개가 자연스럽게 만나도록 편곡했다”고 설명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파반느’ ‘엄지 동자’ ‘파고다의 여왕 레드로네트’ ‘미녀와 야수의 대화’ ‘요정의 정원’ 등 제1곡부터 제5곡까지 상상의 그림이 펼쳐졌다.

손열음, 스베틀린 루세브, 조성현, 함경, 유지인, 손일훈 등 6명이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파이플랜즈 제공


앙코르 곡은 엔리케 그라나도스의 ‘토나디야 스타일의 옛노래’ 중 ‘마하의 시선’. 또 한 번 깨알쇼가 연출됐다. 곡이 끝나가면서 오보에, 클라리넷, 바이올린, 피아노 순서대로 연주자들이 차례대로 조심조심 퇴장했다, 하이든 고별 교향곡처럼. 나중엔 첼로 홀로 남아 음악을 마무리했다. 임팩트 있는 종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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