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작곡가 이안삼(1943~2020)은 1967년부터 2006년 정년퇴임 때까지 주로 김천중학교와 김천고등학교에서 음악 교사 생활을 했다. 39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꾸준하게 한국 가곡도 창작했다. 하지만 그 당시 경북 김천은 먼 지방이었다. 전국구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려면 서울에서의 데뷔가 필요했다. 2000년 10월 16일 여의도 영산아트홀에서 작곡발표회를 열었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서울 입성의 순간이었다.
음악회 타이틀은 ‘작곡가 이안삼 가곡의 밤-모란꽃 그대여’. 김경희 시인의 작품을 제목으로 사용했다. 사회는 언론인 겸 방송인 이후재(1943~2024) 씨가 맡았다. 그는 이안삼과 같이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을 다녔다. 이안삼은 나중에 스승인 김동진 작곡가를 따라 경희대로 옮겼고, 이후재 씨는 중앙대를 졸업했다. 똑같이 1943년생이었기 때문에 아삼육으로 지냈다. 프로그램북에 이안삼과의 애틋한 추억을 담았다.
“대학시절에 작곡 전공인 이안삼, 신귀복(1937년생) 씨와 교유관계였다. 특히 친구 이안삼에게는 노랫말을 써주기도 했는데, 40년 후 연주와 더불어 CD로 출판된다니 놀라움과 부끄러움이 교차된다. 아득히 잊어버렸던 19세 때의 어린 시절 습작이다. 아무생각 없이 넘겨주었던 그 시를 40년간 버리지 않고 간직해, 2000년 서울 여의도 하늘 아래 국내 정상의 성악가들이 부르는 노래와 우렁찬 오케스트라 반주로 감상할 수 있다니 감회가 새롭다. 작곡가의 프로 정신이 무서울 만큼 치밀한 것을 보면서 나는 그래도 세상사는 멋과 낭만이 있어 신선하다고 느낀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근사한 일인가! 방송계에서 ‘코미디는 반복하면 죽는다’고 하는데 ‘음악은 영원히 반복할 수 있다’는 현실은 너무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이후재 씨의 가사로 만든 노래가 ‘꿈길’이다. 친구의 시를 40년간 고이 품고, 거기에 선율을 붙여 세상에 내보낸 우정이 아름답다. 이처럼 이안삼은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인연이라도 천금 같이 소중하게 생각했다. 또한 생각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인연을 이어간 사람이다. 이안삼 주위에 유독 많은 시인들과 성악가들이 즐비한 이유는 그가 말로만 떠들은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준 힘이 컸다.
지난 15일 오후 여의도 영산아트홀. 24년 전 이안삼의 서울 첫 작곡 발표회 장소에서 그를 추모하는 ‘제4회 이안삼가곡제’가 열렸다. 이안삼 작곡가의 곡 18곡과 초청 작곡가(김성희·박경규·신귀복·윤학준·장동인·정덕기·한성훈)의 곡 7곡이 연주됐다.
이후재 씨처럼 한국 예술가곡의 거장과 촘촘하게 인연을 맺은 성악가와 시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성악가 13명 중에는 그동안 스케줄이 안맞아 함께 하지 못했던 새 얼굴도 여섯 명이나 눈에 띄었다. 신승아·이미경·이주영·김성록·하만택·이응광은 첫 출연이었다. 시인은 고영복·고옥주·공한수·김필연·노중석·다빈·문효치·서공식·서영순·심응문·안문석·유자효·윤은경·이귀자·이명숙·이향숙·장장식·전세원·조재선·최숙영·한여선·황여정 등 22명이 참여했다.
소프라노 김민지는 ‘봄이 왔네’(공한수 시·장동인 곡)를 불렀다. 곡명에 어울리게 핑크색 드레스를 입은 그는 “남에서 불어오는 싱그런 봄 향기에/ 마음이 살랑살랑 눈썹도 간질대네”라고 노래했다. 땅을 박차고 꿈틀꿈틀 솟아오르는 기운 때문에 눈썹이 간질대는 봄이 눈앞에 펼쳐졌다.
봄이 너무 더디게 온다. 벌써 이만큼 와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 한참 멀었다. 시인은 그런 봄에게 “정녕 이 세상을 버려 버린 줄 알았다”며 속상한 마음을 내비친다. 소프라노 김성혜는 ‘갈망의 봄’(조재선 시·이안삼 곡)에 흐르는 이런 정서를 잘 짚어내며 저 멀리 아련하게 다가오는 계절을 찬미했다. ‘사랑을 그리며’(이향숙 시·신귀복 곡)는 100전 100승의 깔끔한 러브송이다. 만약 썸을 타는 사람이 있다면, 이 고백을 듣고 안 넘어올 수 없으리라.
한국 가곡의 매력 포인트 중 하나는 결정적 순간이다. 99%보다 1%가 더 황홀하게 다가오는 찰나가 있다. 소프라노 신승아는 ‘매화연가’(황여정 시·이안삼 곡)에서 “꽃향기 하도 맑아 눈을 감고 사무치네”라며 절창을 토해냈고, 또한 ‘마음 하나’(전세원 시·이안삼 곡)에서는 “소박하게 아름다운 마음 하나 간직하리라”라며 전율을 선사했다.
“그대에게 그대에게 녹차 한 잔 따를 때/ 내 마음도 하염없이 그대에게로 흘러가네” “별 같은 마음으로 지친 땅에 꿈을 심고/ 험한 세상 솜털에 실어가는 그대는 민들레” 녹차도 사랑이고 민들레도 사랑이다. 소프라노 이미경은 ‘녹차 한 잔’(고옥주 시·정덕기 곡)과 ‘그대가 꽃이라면’(장장식 시·이안삼 곡)을 통해 겉으론 담담하지만 속으론 차돌 같은 엔드리스 러브를 담아냈다.
역시 베테랑이다. 소프라노 임청화의 관록과 스킬은 여전했다. 그가 “잊지 말라 잊지 말라네”라고 ‘물망초의 노래’(최숙영 시·김성희 곡)를 부르자 잊었던 기억마저 소환되는 서프라이즈를 경험했다.
소프라노 조정순은 ‘나 이리하여’(이귀자 시·이안삼 곡)의 하이라이트 파트에서 “우리 서로 사랑을 위하여/ 우리 서로 사랑을 나누어요/ 우리 서로 행복을 나누어요”라며 고음 포텐을 폭발시켰다. 짜릿했다. ‘메밀꽃 필 무렵’(한여선 시·이안삼 곡)을 듣고는 허생원, 동이, 조선달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봉평장으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금을 뿌린 듯한 풍경은 덤이리라.
이주영은 ‘시실리’(윤은경 시·이안삼 곡)를 연주했다.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다. 젊었을 때 인생은 길다고 생각했는데 나이 들면서 점점 짧아진다. 시간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럴 때마다 시간을 잊을 수 있는 곳, 시실리(時失里)가 있었으면 좋겠다. 담백하고 깔끔한 메조소프라노의 목소리는 관객 모두를 잠시나마 시실리로 인도했다.
테너는 4명이 출연했다. 각각의 보이스마다 개성이 뚜렷해 비교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김성록은 KBS 예능프로그램 ‘남자의 자격’ 청춘합창단에 출연하면서 얼굴을 알렸다. 그는 ‘비록’(다빈 시·이안삼 곡)과 ‘내 마음 그 깊은 곳에’(김명희 시·이안삼 곡)을 들려주며 ‘꿀포츠’라는 별명이 헛말이 아님을 입증했다.
구절초(九節草)는 9월에서 10월까지 산기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음력 9월 9일에 채집해 쓰면 약효가 가장 뛰어나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정원이 ‘구절초 마을’(노중석 시·이안삼 곡)을 부르자 빈 골짜기를 채운 은은한 향기가 콘서트장까지 밀려왔다. 까맣게 여문 씨앗도 후드득 떨어졌다. 이정원의 목소리를 타고 청각, 시각, 후각이 한꺼번에 몸을 감쌌다. 노래의 매직이다.
이현은 노래할 때 항상 FM자세를 유지한다. 허리를 곧추 세우고 정면을 똑바로 바라본다. ‘세월의 안개’(안문석 시·이안삼 곡)는 이런 포즈 덕에 중후한 아름다움이 더 반짝였다. 그대는 내게 모든 것이었다, 그대는 내 맘의 주인이었다고 고백하는 한 남자의 진심이 가슴을 울렸다. “책갈피 속 낡은 사진 하나 세월의 안개를 거두어 준다”에서는 목소리를 길게 뽑아 마무리하자 환호가 쏟아졌다.
‘님마중’(이명숙 시·한성훈 곡)은 반주가 멋지다. 피아노 하나일 뿐인데도 오케스트라 필이 느껴진다. 거기에 가사도 멋지다. 행여 님이 오실 때 길 잃지 말라고 달빛까지 마중을 나가는 마음이라니. ‘솟대’(김필연 시·이안삼 곡)도 마찬가지다. 행여 높으면 보이려나, 나래 타면 행여 닿으려나하고 긴 꼿발(‘까치발’의 전남 방언)로 서 있는 간절함이라니. 하만택의 담담한 보이스에 실려 두 곡이 문신처럼 가슴에 박혔다.
바리톤 송기창이 ‘나지막한 소리로’(고영복 시·이안삼 곡)의 마지막 부분 “우리들의 사랑을 노래 부르리라”를 채 마치지 않았는데, 벌써 박수가 터졌다. 관객들이 감동을 주체 못해 저절로 손이 먼저 반응한 것. ‘주목’(심응문 시·이안삼 곡)에서는 천년을 살다 말라 죽은 나무의 푸르렀던 흔적이 긴 여운을 남겼다.
바리톤 이응광의 고향은 김천이다. 김천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같은 동향 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생전 이안삼 선생과 많은 교류를 하지 못한 안타까움과 속상함 때문에 이번 가곡제에 꼭 참여하고 싶었다. ‘잔향’(이연주 시·윤학준 곡)은 한 편의 오페라를 보는 듯 묵직했고, ‘그대 앞에 봄이 있다’(김종해 시·이안삼 곡)에서는 뛰어난 표현력을 뽐냈다.
이번 네 번째 이안삼가곡제에는 중간 중간 이중창을 넣어 악센트를 줬다. 이주영과 이응광은 ‘들꽃의 향기처럼’(서공식 시·이안삼 곡)을 연주했다. “비로소 긴 기다림 눈뜨는 사랑이여”(이주영) “한달음에 달려가는 들꽃 같은 그리움아”(이응광)를 사이좋게 나눠 부르더니, “넘쳐 넘쳐 흐르는 온 사랑의 시원이여”에서 손을 맞잡고 하나의 목소리로 합치는 부부의 환상케미를 보여줬다.
김성혜·송기창의 ‘우리의 사랑’(서영순 시·이안삼 곡)은 천년을 기다려 만난 세상 모든 커플들을 위한 응원가였고, 김민지·이정원의 ‘떠날 줄 알게 하소서’(유자효 시·박경규 곡)는 가짐보다 더 소중한 것은 잃을 줄 아는 것이라는 깨우침을 주는 숭고한 미사곡이었다. 또한 임청화·이현이 노래한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문효치 시·이안삼 곡)는 사랑의 근원적 물음에 답하는 영원불멸 사랑의 찬가였다. 피날레는 모든 출연자들이 ‘들꽃의 향기처럼’을 합창하며 마무리했다.
이날 음악회는 이안삼가곡제 한상완(전 연세대 부총장·시인) 운영위원장의 리드 아래, 시인 장장식과 김정주가 사회를 봤고 피아니스트 이성하와 장동인이 반주를 맡았다. 김문기 작가는 사진과 영상을 담당했다. 두 진행자는 “오늘 공연은 만석을 만들어준 여러분이 일등공신이다”라며 “누구의 음악회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음악회였다”고 클로징 멘트를 날려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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