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가 야쿠프 흐루샤가 지휘하는 밤베크르 심포니와 호흡을 맞춰 막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연주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36)의 ‘밤베르크 심포니 앓이’는 오래됐다. 은사인 김영욱 서울대 특임교수(77) 때문에 ‘아이 라이크 밤베르크’가 시작됐다. 김봄소리는 서울대 음악대학 재학 시절 김 교수에게 배웠다. 김 교수는 1972년 오코 카무가 지휘하는 밤베르크 심포니와 협주 음반을 냈다. 막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펠릭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담겼다. 김봄소리는 은사의 이 앨범을 “어렸을 때부터 닳도록 들었다”며 “그 음반을 통해 밤베르크 심포니를 알게 됐고 그때부터 밤베르크의 팬이 됐다”고 고백했다.
53년 전 스승이 그랬듯 김봄소리는 최근 밤베르크 심포니와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담은 새 음반 ‘브루흐&코른골트(BRUCH & KORNGOLD)’를 발매했다. 2021년 ‘바이올린 온 스테이지(Violin on Stage)’ 음반에 이어 4년 만에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로 발매한 두 번째 정규 음반이다. 정규 음반으로 낸 첫 협주곡 음반이기도 하다. 지난 5월 30일 기자간담회에서 김봄소리는 첫 협주곡 음반을 꼭 밤베르크와 녹음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다른 오케스트라에서 제안이 많이 있었지만 첫 협주곡 음반을 밤베르크와 녹음하고 싶어 2~3년을 기다린 것 같아요. 어릴 적 꿈이 이뤄진 순간이죠. 밤베르크 심포니와 음반을 출시하고 아시아 투어를 함께 할 수 있어 정말 기쁘고 감사합니다.”
‘브루흐&코른골트’ 음반에는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함께 코른골트의 소품 4곡을 더해 모두 6곡을 수록했다. 6곡 중 피아니스트 토마스 호페의 반주로 녹음한 코른골트의 소품 2곡을 제외한 나머지 4곡은 모두 밤베르크 심포니와 연주했다. 2016년 9월부터 상임 지휘자로 밤베르크 심포니를 이끌고 있는 야쿠프 흐루샤가 지휘봉을 잡았다.
음반 녹음 과정은 김봄소리와 밤베르크 심포니 모두에게 특별한 순간으로 남았다. 흐루샤는 “우리는 아주 깊이 있고 심오한 음악적 순간을 경험했다”며 “보통 스튜디오에서 음반을 녹음하면 당연히 스트레스가 쌓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함께 연주하며 진정한 협업이 이뤄졌다”고 돌아봤다.
김봄소리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김봄소리는 음악에 대해 눈부신 감성과 진정한 영혼을 가진 연주자다”라며 “음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사랑을 가지고 연주하는 것은 물론 음악에 겸손하게 접근하는 뮤지션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서로에 대해 깊이 이해했고 악보에 나온 대로 정확히 연주하고자 했다. 보석 같은 음악이 빛날 수 있게 연주했다”고 설명했다.
스승에 이어 밤베르크 심포니와 꿈에 그리던 음반을 녹음한 김봄소리는 “감히 선생님의 녹음과 비교해 더 나은 부분은 모르겠다. 다만 녹음 분위기는 훨씬 좋았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며 웃었다. 이어 “작곡가가 쓴 그대로 숨겨진 의도와 행간을 읽어내는 데 있어 정말 많이 배우는 기회가 됐다”며 “제가 선생님보다 녹음에서 배울 건 더 많았을 것 같다”며 웃었다.
앨범 발매를 기념해 김봄소리와 밤베르크 심포니는 일본, 한국, 대만으로 이어지는 아시아 투어를 진행했다. 일본에서 3회 공연했고, 한국에서는 성남아트센터(5월 31일)와 예술의전당 콘서트홀(6월 1일)에서 관객을 만났다. 대만에서도 2회 공연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가 야쿠프 흐루샤가 지휘하는 밤베크르 심포니와 호흡을 맞춰 막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연주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가 야쿠프 흐루샤가 지휘하는 밤베크르 심포니와 호흡을 맞춰 막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연주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예술의전당 공연을 감상했다. 파란 드레스를 입은 김봄소리가 흐루샤와 함께 무대로 나왔다. 브루흐는 요하네스 브람스처럼 독일 낭만주의 시대 후기에 활약했다. 약점도 있었다. 보수적인 작풍에 내용적 깊이가 부족했던 탓에 그의 작품 대부분은 빠르게 잊혀갔다. 오늘날 그의 명성은 단 세곡의 협주 작품에 의존하고 있다. 바로 ‘스코틀랜드 환상곡’과 ‘콜 니드라이’, 그리고 최대 히트곡인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이다. ‘1번 g단조(Op.26)’는 브람스, 멘델스존의 걸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독일 낭만주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대표작이다.
팀파니가 트레몰로로 여린 음을 깔아놓고 목관이 그 위로 조용한 화음을 얹어 놓으며 1악장 서주가 시작됐다. 곧이어 바이올린 솔로가 비극적인 표정으로 등장해 즉흥적인 카덴차를 연주하며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정점에서 관현악 총주가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며 주부로 진입했다. 대담하고 격정적인 1주제와 유려하고 비감 어린 2주제를 대비시켜 뜨겁고 힘차게 전개된다. 가곡을 노래하는 것처럼 면면히 이어지는 선율의 흐름이 아름답고 화려한 기교를 과시하는 바이올린 솔로와 중후한 관현악의 대비는 절묘하다. 말미에서 제1바이올린이 음을 길게 유지하면서 쉼 없이 다음 악장으로 넘어갔다.
2악장은 브루흐의 서정적 선율 작법이 빛나는 완서악장(緩徐樂章)이다. 나직하고 애잔하게 이어지는 숙고와 음미의 선율, 보다 절절하게 심화되고 고조되는 고뇌와 호소의 선율, 다채로운 장식이 가미된 갈망의 선율 등을 사뭇 드라마틱하게 엮어 나가며 풍부한 감흥을 자아낸다.
3악장은 역동적이고 눈부신 피날레다. 서로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두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새로운 미래를 향한 설렘을 불러일으키는 도입부를 지나 힘차게 등장하는 춤곡풍의 1주제는 격정적이고 활력 넘치는 승리의 몸짓으로 도약하며 환희에 찬 미래를 향해 전진한다. 뭉클한 감격을 자아내는 2주제는 여지껏 응축해 놓은 우수와 정한을 한꺼번에 분출하며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두 주제는 열정적으로 교차하며 감동적인 시너지를 연출하다가 마침내 장쾌한 클라이맥스에 도달해 뜨겁게 연소한다. 1~3악장 모두 오케스트라와 동등한 크기를 갖기 보다는 바이올린의 색채가 더 뚜렷했다. 김봄소리의 개인기가 돋보였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가 야쿠프 흐루샤가 지휘하는 밤베크르 심포니와 호흡을 맞춰 막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연주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가 야쿠프 흐루샤가 지휘하는 밤베크르 심포니와 호흡을 맞춰 막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연주한뒤 관객에게 90도 폴더인사를 하고 있다. ⓒ박정옥기자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가 야쿠프 흐루샤가 지휘하는 밤베크르 심포니와 호흡을 맞춰 막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연주한뒤 관객에게 90도 폴더인사를 하고 있다. ⓒ박정옥기자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가 야쿠프 흐루샤가 지휘하는 밤베크르 심포니와 호흡을 맞춰 막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연주한뒤 관객에게 90도 폴더인사를 하고 있다. ⓒ박정옥기자
폴란드에서 김봄소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떴다하면 객석이 꽉 찬다. ‘폴공(폴란드 공주)’이라고 불릴 만큼 절대적 팬덤을 확보하고 있다. 김봄소리는 올해부터 폴란드의 가장 중요한 여성 작곡가인 그라지나 바체비치(1909~1969)의 음악을 알리는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바체비치의 ‘폴란드 카프리스’를 앙코르로 선사했다. 지난 2023년 6월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라하브 샤니가 지휘한 로테르담 필하모닉의 공연에서도 앙코르로 이 곡을 들려줬다. 빠르고 리드미컬한 선율이 일품이다.
“밤베르크 심포니의 제2바이올린 멤버인 가브리엘레 캄파냐는 제 유튜브의 애청자입니다. 그가 저를 위해 크라이슬러의 ‘아름다운 로즈마린’을 바이올린 독주곡으로 편곡해줬습니다. 그 곡을 들려줄게요.” 두 번째 앙코르는 김봄소리가 얼마나 깊이 밤베르크 단원들과 친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는지를 보여줬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빅사운드는 귀를 즐겁게 해줬고, 최근 보여주고 있는 90도 폴더 인사를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음악평론가 허명현은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한 김봄소리는 지금까지 들었던 봄소리 연주 중 가장 완결성이 높은 연주였다. 역시 음반 작업 직후의 연주라 악단과의 호흡이 뛰어났다. 그 뒤로 흐르는 밤베르크 심포니의 아주 정교하면서도 따뜻한 음악은 더 기억에 남는다. 얼마 전 브루흐 무덤에 다녀왔던 길들도 생각났다”고 말했다.
야쿠프 흐루샤가 밤베크르 심포니와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을 연주한 뒤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야쿠프 흐루샤가 밤베크르 심포니와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을 연주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김봄소리 연주에 앞서 1부에서 흐루샤와 밤베르크 심포니는 리하르트 바그너를 준비했다. 바그너가 스무 살 때 쓴 첫 번째 오페라 ‘요정들’의 서곡을 들려줬다. 전 3막 구성의 오페라는 트라몬트 왕국의 왕자 아린달과 요정나라의 공주 아다의 사랑과 결혼에 얽힌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E장조의 서곡은 이런 오페라의 낭만적 내용과 환상적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다. 주요 캐릭터와 극 중 상황과 연계된 주제나 동기를 반복하는 방식은 훗날의 라이트모티브(leitmotiv)를 예고하고 있다.
밤베르크 심포니는 2부에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을 연주했다. 단원들이 모두 나와 자리를 잡았지만 지휘자가 오랫동안 등장하지 않았다. 왼쪽 출입문이 열렸는데 한 바이올린 주자가 뒤늦게 입장해 구석자리에 앉았다. 왜 지휘자가 나오지 않았는지 이해됐다. 곧 흐루샤가 웃으며 나오자 바이올린 주자는 앞쪽 원래의 자기 자기로 찾아 들어갔다.
교향곡 7번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갈린다. 슈만의 장인 프리드리히 비크는 “첫 악장과 피날레는 술에 취해 작곡한 것 같다. 선율이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은 전문가와 비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고 혹평했다. 반면에 리하르트 바그너는 ‘춤의 성화’라며 찬사를 보냈다. 그는 “지금까지 작곡한 가장 완벽한 교향곡 중 하나다. 강력한 디오니소스적 충동의 분출과 그 정신의 신성한 도취가 가득하다”고 찬미했다. 역시 중요한 것은 대중의 반응이다. 그들은 이 원초적이고 도취적인 ‘리듬의 교향곡’에 환호했다.
1악장은 ‘포코 소스테누토-비바체’, 즉 ‘조금 끌 듯이-활기차게’다. 베토벤 교향곡 가운데 가장 긴 도입부다. 장쾌한 울림으로 문을 연 뒤에 점진적으로 열기와 활력을 더해 나가고, 잠시 소강 국면에 접어 들어다가 다시 생기 있는 모습을 띠며 주부로 진입한다. ‘비바체’ 주부에서는 일단 목관에서 전편을 통합하는 기본 리듬이 선명하게 부각되고, 그 리듬에서 도출된 1주제가 경쾌하게 펼쳐지고 역동적으로 솟구치며 진행된다. 이후 보다 유연하게 도약하는 2주제가 가세한 다음 음악은 시종 리드미컬한 파동을 타고 넘실거리듯 진행되다가, 교묘하게 고조되고 구축된 클라이맥스에 도달한 다음 호쾌하게 마무리됐다.
2악장은 통상의 완서악장을 대신하는 ‘알레그레토(조금 빠르게)’다. 비장한 표정의 주제와 그 변주가 주도하며, 중간 중간 아련한 환영처럼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삽입돼 있다. 살짝 무겁고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다. 흡사 장송곡을 연상시키는 이 악장의 분위기와 정서는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혹시 자나온 격동의 시간에 대한 반추나 희생된 영웅들에 대한 추도는 아닐까.
3악장은 두 개의 트리오를 품은 대규모 스케르초 악장이다. 다분히 서민적인, 혹은 시골스러운 활력을 지닌 스케르초는 ‘리듬 세포’에 강약의 대비와 휴지, 스타카토 등이 절묘하게 배합돼 흥미진진한 효과를 빚어냈다.
4악장은 미친 속도감이 지배한다. 서킷에 바짝 붙어 달리는 F1급 스피드의 악장이다. 귀로 들었을 뿐인데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장대하고 격렬한 피날레 악장은 두 차례 반복되는 요란한 제스처와 침묵의 조합으로 출발한다. 러시아 민요에서 빌려온 1주제는 열정적이면서 수선스럽고, 마치 술에 취해 흥청거리는 듯한 2주제는 역동적이고 유머러스하다. 연료통을 가득 채운 휘발유. 최후의 한 방울까지 태워 없애버리겠다는 결의가 가득하다. 끊임없이 소용돌이치고 한없이 용솟음치고 곤두박질했다. 현악 파트는 손에 쥐가 나고, 관악 파트는 입이 마비될 지경이었으리라. 광란의 정점에서 갑자기 끝나는 마침도 쇼킹했다.
야쿠프 흐루샤가 밤베크르 심포니와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을 연주한 뒤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앙코르도 작정하고 나왔다. 브람스의 헝가리안 댄스 17번, 18번, 21번을 드보르자크가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편곡한 곡을 들려줬다. 콘서트홀 천장으로 관객 마음을 붕붕 띄웠다. 체코 친화적인 밤베르크 심포니의 정체성을 드러낸 선곡이다. 밤베르크 심포니는 체코슬로바키아에 살던 독일인들이 독일 바이에른주의 소도시인 밤베르크로 건너가 1946년 세운 악단이다. 독일 음악과 체코 음악의 절묘한 공존이 트레이드 마크다.
허명현 평론가는 “흐루샤는 앞으로 우리에게 좋은 음악을 책임져 줄 지휘자다. 거장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면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 특히 베토벤 교향곡 7번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음악이 흘러나와 감탄했다. 기능적으로도 훌륭하고, 특히 2악장은 그 흐름조차 비범했다. 순간적으로 등장하는 악단 고유의 톤도 아름다웠고, 악기의 밸런스가 정말 뛰어났는데, 빠르기나 음량이나 톤 변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져도 밸런스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참 아름답다. 지휘자는 베토벤 7번이 얼마나 대단하고 혁신적인지를 직접 보여줬다”고 말했다.
그려면서 “밤베르크 심포니가 한국에 올 때마다 느끼지만, 이 사람들은 늘 성의 있게 투어를 준비해 온다. 그러고 보니 첫 내한을 함께한 블롬슈테트가 베토벤 5번과 6번을 선사했으니, 오늘은 이어서 흐루샤의 7번이었다. 분명 앞으로 더더욱 바빠지게 될 지휘자라, 자주자주 봐둬야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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