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정재일(오른쪽)과 얍 판 츠베덴 서울시향 음악감독이 23일 서울 종로구 더프리마아트센터에서 열린 ‘2025 서울시향 신작 발표 기자간담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을 쓴 것이 처음이기 때문에 마에스트로(얍 판 츠베덴 음악감독)에게 악보를 건넸을 때 채점 받는 초등학생의 마음이었습니다.”
작곡가 정재일이 생애 처음으로 만든 관현악곡 ‘인페르노(Inferno)’ 세계 초연을 앞두고 긴장된 마음을 드러냈다. 25일과 26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연주한다. 이날 공연에서는 피아니스트 박재홍이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를 협연하고, 서울시향은 브람스 교향곡 1번도 들려준다.
정재일은 23일 서울 종로구 더프리마아트센터에서 열린 신작 발표 간담회에 얍 판 츠베덴 감독과 함께 참석했다. 그는 세상에 첫 선을 보이는 ‘인페로노’의 드라마틱한 창작과정을 공개했다.
판 츠베덴은 2023년 1월 음악감독으로 선임된 뒤 첫 기자간담회에서 정 작곡가와 작업하고 싶다고 밝혔다. 정재일은 “기사를 보고 판 츠베덴 감독이 러브콜을 보냈다는 것을 알았는데, 무엇보다도 과연 저 같은 ‘조무래기’를 어떻게 아셨을까 궁금했다”라며 “몇 달 뒤 정말로 만나자는 연락을 받아 놀랐다”고 했다. 4월 첫 대면했다.
“솔직히 곡을 위촉 받았을 때 부담감이 너무 컸어요. 그동안 영화와 드라마 등 영상 콘텐츠를 위해 작업을 해왔던 사람이라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단지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그리고 중요한 한 가지가 있는데 스토리만 있으면 된다’고 강조하셨어요. 그 말에 용기를 얻어 한번 해보기로 마음먹었죠.”
작곡가 정재일(오른쪽)과 얍 판 츠베덴 서울시향 음악감독이 23일 서울 종로구 더프리마아트센터에서 ‘2025 서울시향 신작 발표 기자간담회’에 참석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 게임’ 음악감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정재일이지만 낯선 관현악곡 도전은 엄청난 경험이었다고 한다. ‘지옥’이라는 뜻을 가진 ‘인페르노’는 그가 즐겨 읽는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힌트를 얻었다.
“늘 곁에 두고 틈틈이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는 책인데, 마지막 문장이 눈에 확 들어왔어요. 마르코 폴로와 쿠빌라이 칸의 대화 부분이었죠. ‘인페르노는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 안에 있다. 그래서 인페르노 안으로 침잠하면서 그들과 동화될 것인가, 아니면 인페르노가 아닌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냐’라는 내용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완성하는 데는 1년 정도 걸렸다. 정재일은 지난해 9월 ‘2024 서울시향 파크 콘서트’에서 판 츠베덴과 협업했다. ‘오징어 게임’ 메들리와 ‘기생충’ OST를 서울시향 오케스트라의 선율로 해석하며 호흡을 맞췄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작곡에 매달렸다. “데드라인이 다가오면 초인적인 힘이 생기는 게 창작의 또 다른 매력이니, 어쩌면 마지막 2개월이 진짜 작곡 기간이었다”고 말했다.
정재일은 “제 삶이 어땠는지 계속 돌아보게 되고, 정말 비극적인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지고 있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 우리가 놓여 있다고 거의 매일 생각했다”며 “기존 음악 작업과 가장 달랐던 것은 음악에서 모든 것을 시작해 음악으로 모든 것을 끝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곡을 만드는 동안 지옥 같은 절망의 날들을 보냈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곡을 의뢰한 판 츠베덴은 ‘오징어 게임’ 음악을 듣고 곧바로 정재일을 섭외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말했다. “항상 흥미롭고 강렬한 음악을 하는 작곡가를 찾는데, 정재일은 타깃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연락을 해서 우리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작곡가 정재일이 23일 서울 종로구 더프리마아트센터에서 열린 ‘2025 서울시향 신작 발표 기자간담회’에서 답변을 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얍 판 츠베덴 음악감독이 23일 서울 종로구 더프리마아트센터에서 열린 ‘2025 서울시향 신작 발표 기자간담회’에서 답변을 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지난 4월 완성된 ‘인페르노’는 5개월의 준비 기간을 거친 뒤 22일 서울시향 리허설에서 처음 연주됐다. 이 자리에 참석한 정재일은 시험 성적표를 받는 기분으로 연주를 들었다고 한다.
그는 “처음으로 풀 오케스트라를 위한 음악을 만들어야 해 작곡하는 내내 채점 받는 초등학생의 기분이었다”며 “특히 리허설에선 100명의 선생님 앞에서 채점을 받는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했다”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완벽하게 곡을 소화해내는 판 츠베덴과 단원들에게서 경외감마저 느꼈다고 치켜세웠다. “모든 것을 철저하게 준비해 온 연주자들과 지휘자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며 “완벽에 가까운 연주를 보여줘 엄청난 경험과 학습의 시간이었다”고 밝혔다. “꼬마시절 밴드(프로젝트 그룹 ‘긱스’의 멤버로 활동)할 때의 기분을 다시 느껴 기분도 좋았다”고 덧붙였다.
정재일은 “러닝타임은 18분 정도로 총 4개의 장으로 구성됐는데 천천히 음들이 퇴적되다가 화산처럼 폭발하는 등 다채로운 모습을 보인다”며 “결국은 관객이 스스로 느끼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공연장을 나설 때 관객의 마음에 남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라고 말했다.
작곡 마지막 순간의 진통도 고백했다. 그는 영감의 원천이었던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내레이션 형식으로 넣어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관객, 연주자, 지휘자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불필요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뺏다”고 말했다. 역시 붙이기보다는 덜어내야 함을 다시 실감한 셈이다.
작곡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자신에게 작곡을 의뢰한 판 츠베덴에 대한 믿음 하나로 곡을 완성해낼 수 있었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완성된 곡에 대해 서울시향이 좋은 반응을 보였지만 여전히 ‘내가 제대로 작품을 만들었을까’라고 고민하게 됐다”며 “하지만 세계적인 거장이 함부로 말씀할 리가 없다는 생각에 안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작곡가 정재일(오른쪽)과 얍 판 츠베덴 서울시향 음악감독이 23일 서울 종로구 더프리마아트센터에서 ‘2025 서울시향 신작 발표 기자간담회’에 참석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판 츠베덴 감독 역시 자신이 믿었던 정재일의 신곡에 만족감을 표했다. “아주 강렬하면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시대에 위안을 줄 음악이다”라며 “어둡게 들리기도 하지만, 그 안에 탈출구도 존재한다. 공포가 있지만 분출도 있고 결국에는 평화로 귀결되는 곡이다”라고 평했다.
판 츠베덴은 자기 작품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의심하는 정재일의 작업 태도에 대해서도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저도 ‘과연 내가 잘하고 있나’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음악 작업을 하고 있다”며 “자기 음악을 성실하게 해내는 정재일의 곡은 많은 울림을 줄 것이다”라고 기대했다. 이어 “정재일에게 이번이 첫 번째 오케스트라 작품이지만 앞으로 그의 두 번째, 세 번째 작품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라고 확신했다.
‘인페르노’는 한국 초연에 이어 다음 달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세계무대에 데뷔한다. 판 츠베덴 감독과 서울시향은 10월 27일 카네기홀에서 열리는 미국투어 연주회에서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김봄소리 협연),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등 세계적인 작곡가들의 작품과 함께 ‘인페르노’를 연주한다. 또한 11월 1일 오클라호마주 스틸워터 공연에서도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주제에 위한 랩소디’(박재홍 협연), 브람스 교향곡 1번과 함께 연주한다.
판 츠베덴 감독은 “‘인페르노’는 충분히 멘델스존, 라흐마니노프, 브람스의 곡과 함께 연주될만한 곡이다”라며 “정재일만의 이야기와 개성이 담긴 독특한 작품에 미국 관객들도 만족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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