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건우 “나를 따뜻하게 해줬던 ‘고예스카스’”...40년만에 앨범 발매 꿈 이루다

“이젠 음악 즐기고 싶어” 연주자의 스트레스 솔직 고백
10월8일 예술의전당 등 인터미션 없이 7곳서 리사이틀

김일환 기자 승인 2022.09.19 22:34 | 최종 수정 2022.10.28 10:00 의견 0
“이젠 음악을 즐기고 싶다.”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19일 그라나도스의 ‘고예스카스’ 새 앨범을 발매하고 전국 리사이틀 계획을 밝히고 있다. ⓒ빈체로 제공


[클래식비즈 김일환 기자] “40여년 전의 일입니다. 젊은 시절, 뉴욕에서 알리시아 데 라로차가 연주하는 ‘고예스카스’를 들었습니다. 그때가 늦가을인지 초겨울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피아노 소리가 퍼지는 순간 차가웠던 카네기홀에 갑자기 환한 햇볕이 쏟아지는 느낌이었죠. 그 따뜻함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화려하고 황홀했죠. 언젠가 이 곡을 꼭 해보고 싶다고 결심했는데, 드디어 아주 오래된 꿈을 이루었습니다.”

깜짝 놀랐다. ‘대가’라는 타이틀이 붙은 올해 76세의 피아니스트도 이루고 싶었던 로망이 있었다니. 백건우가 스페인 작곡가 엔리케 그라나도스(1867~1916)의 피아노 모음곡 앨범 ‘고예스카스(Goyescas)’를 발매했다. '고예스카스'는 '고야의 그림풍' '고야의 회화풍 정경' '고야의 그림 스타일' 이라는 뜻이다.

19일 서울 서초동 스타인웨이 갤러리 서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30대 초반으로 돌아간 듯 설레는 마음을 드러냈다. 얼굴에 간간이 미소도 번졌다.

그라나도스는 국내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한 작곡가다. 스페인 출신의 대표 작곡가인 파야와 알베니즈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스페인 민족음악을 바탕으로 낭만적이고 따뜻한 선율을 그려낸 인물이다.

“이젠 음악을 즐기고 싶다.”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19일 그라나도스의 ‘고예스카스’ 새 앨범을 발매하고 전국 리사이틀 계획을 밝히고 있다. ⓒ빈체로 제공


‘고예스카스’는 그라나도스가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전람회를 본 후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 원래는 두 권으로 나누어 출판됐다. 1권은 ‘사랑의 속삭임’ ‘창가의 대화’ ‘등불 옆의 판당고’ ‘비탄, 또는 처녀, 그리고 나이팅게일’ 4곡으로 구성됐다. 2권에는 ‘사랑과 죽음 : 발라드’ ‘에필로그 : 유령의 세레나데’ 2곡이 수록됐는데, 나중에 세 번째 곡인 ‘지푸라기 인형’이 추가됐다. 그래서 모두 7곡으로 구성됐다.

열정, 사랑, 우아함 등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의 흐름과 각 곡에 다채롭게 표현된 끝없는 상상력이 가득 담겨있다. 마치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스페인의 색채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백건우는 “그라나도스의 곡은 감정표현이 자유롭다. 형식을 따르기보다는 인간적이고 즉흥적인 음악이다”라고 소개했다. 그토록 마음속에 품었던 음악을 세상 속으로 내보내는데 왜 이토록 오랜 세월이 걸렸을까.

“항상 작품을 마주하면 최대한 훌륭한 해석을 이끌어내려고 몰두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즐기고 싶어요. 어느 정도 마음의 자유를 찾고 싶어요. 나이가 들면서 음악과 더 친해지고 서로에게 후해지는 감정이 생겼어요. 음악이 나를 받아주고, 저도 음악을 받아주는 느낌이죠.”

산전수전 겪은 베테랑이 이제야 겨우 여유가 생겼다는 고백은 충격적이다. “음악인으로서 살아남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는 멘트에는, 프로 피아니스트의 지난 66년 동안의 고단한 삶이 그대로 녹아 있다. 연주자 스트레스가 엄청났음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 “음악가로서 커리어를 쌓으려면 짧은 시간에 곡도 익혀야 하고, 나와 맞지 않는 지휘자와 연주도 해야 한다”며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 여유롭게 내가 원하는 곡을 연주하고, 내 스케줄에 맞춰 연주를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만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19일 새 앨범 ‘그라나도스-고예스카스’를 발매했다. 앨범 재킷의 타이틀명을 직접 손글씨로 써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유니버설뮤직 제공


이번 앨범엔 백건우의 정성이 가득하다. 하드커버 앨범의 타이틀명을 자신이 직접 손글씨로 썼다. 재킷 표지의 꽃 사진도 직접 찍었다. 빵강과 노랑으로 이루어진 스페인 국기가 연상돼 골랐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음반 안에는 스페인 풍경을 찍은 사진을 여러 장 넣었다. 유명 관광지나 유적지를 찍은 게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담은 사진들이다. 백건우는 “나는 굉장히 시각적인 연주자다”라며 “그림을 구성하는 요소와 음악을 구성하는 요소는 굉장히 가깝고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열다섯 살 때부터 카메라를 들었는네, 요즘 사진 전시회를 한번 하자를 러브콜도 쇄도한다고 덧붙였다.

백건우는 음반 발매를 기념해 오는 10월 8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백건우와 그라나도스-고예스카스’라는 제목으로 리사이틀을 연다. 이 공연에 앞서 이달 23일 울산을 시작으로 부평, 제주, 마포(서울), 광주(경기), 강릉 등에서도 독주회를 개최한다.

“이젠 음악을 즐기고 싶다.”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19일 그라나도스의 ‘고예스카스’ 새 앨범을 발매하고 전국 리사이틀 계획을 밝히고 있다. ⓒ빈체로 제공


이번 공연은 인터미션 없이 한 호흡으로 70분 가량 진행된다. 백건우는 “‘고예스카스’는 나중에 오페라로 탄생할 정도로 극적인 음악이기에 한 번 치면 처음부터 끝까지 가야한다”고 말했다. 체력적으로 문제가 없겠느냐는 질문에는 “이미 독일과 스페인에서도 연주를 마쳤다. 거뜬하다”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최근 국제 콩쿠르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후배들에게도 조언을 해줬다. 요약하면 음악 자체에 대해 더 고민을 하라는 것. 그는 “현재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는 테크닉 측면에서 예전에 비해 훨씬 앞서 있지만 음악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라며 “음악의 언어는 폭이 넓기에 연주자들은 음악 자체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음악관을 덧붙였다. “음악성은 갖고 태어나지만, 그 깊이에 따라 연주자 생명은 다를 수 있다. 그 뒤엔 노력이 따라야 한다. 좋은 음악성이 있어도 잘 키우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다. 조화를 잘 이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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